둥글다, 둥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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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태풍이 휘젓고 간 며칠 후,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물은 폭이 넓어지다 이내 좁아지고, 깊어지는가 하면 얕은 모습으로 흐른다. 큰 물 지던 어느 언저리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체로 잘 골라 놓은 듯 가장자리엔 검고 고운 모래들이 하천 따라 길게 이어졌다. 집체만 한 바위들과 이어진 바위 사이를 물살에 휘둘리며 건너오느라 돌멩이들은 크기만 다를 뿐 한 얼굴이다.

둥글다.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물이 크면 큰대로, 물살이 약하면 약한 대로 그 크기와 무게만큼씩 부딪히며 구르다 멈춘 자리에 눈이 갔다. 본디 모습들이 어디 하나일 까만, 구르며 오는 동안 휘둘리느라 내어 줄 것은 내어주며 더는 다치거나 손해 나지 않는 방법을 저들도 체득한 것일까.

식사 후, 설거지하며 거실에 있던 막내한테 생각나는 게 있어 묻고, 답을 듣는데 물소리 때문인지 잘 안 들렸다. 재차 대답은 했으나, 또 놓쳐 되묻자 짜증 섞인 말의 꼬리부분만 들렸다. ‘대단할 걸 묻는 것도 아닌데 좀 제대로 알려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못 알아듣는 사람의 특성이 그렇듯, 필요 이상으로 소리가 크게 전달된 모양이다. 순간 발끈하는 것 같아 한 소리 더 보탰다. “너도 나중에 엄마 나이 돼 봐” 감정을 숨겼다지만 벼르듯이 들렸나 보다.

그도 잠시 ‘엄마는 내 나이도 되어보고, 지금 엄마 나이도 되었잖느냐’며 저한테는 까마득한 시간 속 감정까지 강요한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미 내 나이를 경험한 엄마의 그 감정은 대체 뭐냐는, 다분히 항의성 짙은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아뿔싸! 순간 입을 닫았다. 맞는 행동도 아니지만, 틀리지도 않은 말에 옳고 그름에 따른 분별보다 서운함이 먼저 자리했다. 불편한 심사는 남은 그릇을 요란하게 씻는 걸로 마무리했다.

그 나이 내 모습도 저랬을까. 제주속담에 ‘지싯물도 내리는 자리로 내린다.’는 말이 순간 아프게 스쳤다. 사소한 일로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입씨름하며 마음 다치고 힘들어할 바엔 차라리 입 닫는 것이 훨씬 편안할 것 같았다. 말을 아꼈다. 지난 언젠가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해야 될 말도 이젠 점점 조심스럽다. 이렇게 치대며 아프고 위축되다 보면 결국 태풍 속 물살에 휘둘리다 각진 부분은 깎이고, 때론 마모되어 냇가에 구르는 돌처럼 둥글어질까.

노랫말이 좋아 늘 듣고 따라 부르던 대중가요 가사가 생각난다. 어느 대목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던 한 소절을 곱게만 느꼈었다. 문득 이쯤에서 보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고 또, 믿고 싶었음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깊이로 잦아든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딱히 짚어내지는 못하지만 반짝이던 감각들은 저마다 세월의 어느 모서리에서 하나씩 퇴색해 가는 것을 느낀다. 정연하던 언어의 대항력도 이미 그 빛을 잃어가고, 가당찮게 생각들만 무성하게 뻗다가 제풀에 이울고 만다. 그런 모습마저 감추고픈 것은 이내 늙음을 익어간다고 했듯, 둥글어진다고 에둘러서라도 우기고 싶은 것은 아닐까.

땡볕을 온몸으로 대적하며 견뎌 내고, 모진 비바람에 우뚝 선 채, 계절 당기며 결실을 맺느라 온전히 자신의 몫을 다하는 둥근 것들의 생도 그러할까. 새삼 둥근 것들이 위대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둥글다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색깔 다른 친근함으로 줄 다투며 따뜻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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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2020-09-21 19:49:08
곱게도 익어감신게요^^ 글도 맛깔나게 잘 썼신게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