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파두리서 마지막 '구국의 불꽃' 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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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노영희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항공사진.

▲노삼석盧三錫:1640(인조18)~?, 문신. 제주판관. 전라도 함평에서 출생하고 자는 명여命汝이며 본관은 복성, 노득성盧得聖의 아들이다. 1666년(현종7) 문과 식년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 벼슬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1694년(숙종20) 윤 5월에 이수익李受益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96년 4월, 도민에 대한 진휼 문제를 게을리 하였다고 해서 파직되자 떠났다. 이 무렵 제주 유배소에서 소환당하여 귀경 중 정읍에서 1689년 사사당한 송시열宋時烈은 비록 제주에서 불과 100일간의 유배생활이나 도내 유림에게 미친 영향이 커서 1695년(숙종21) 제주 유생들의 요청에 의해 귤림서원에 향사되고 제주 오현五賢으로 추앙되었다.
또 갑술옥사에 의해서 1694년 김덕원金德遠은 관직이 박탈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숙종은 민비를 생각한 나머지 남인의 야심적인 정치모략에 불신감을 지녀 동년 7월 민암閔黯을 사사하게 하고 이때 김덕원은 제주에 유배되어 4년 만에 해남으로 이배되고 방환되었다.
▲노상옥盧尙玉:생몰년 미상, 한말 제주 의병의 항일 활동. 제주면 광양<동-과양>에서 거주하였다. 제주의 의병 활동의 원인遠因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황제를 군대로 위협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데 대해 온 국민이 분노가 분출, 국권 회복을 외치는 데서 일어난 거사였다.
또 근인近因으로는 1908년 제주 경찰서장에 통감부의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를 임명, 일본 경찰 다수를 인솔하여 부임, 대정·정의·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하여 도민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8년 12월에 사임하고 떠나는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제주를 떠났다.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高仕訓(39, 의병장), 이석공李錫公(개명 중심中心), 김석윤金錫允(개명 석명錫命),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사였다.
결전決戰 거사일을 동년 3월 3일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하여 격문과 통고문을 2월 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려, 병력 동원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당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안성·광청 등지에서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노씨부인盧氏夫人(여):생몰년 미상, 유배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부인. 김제남(1562~1613)은 선조의 장인으로서 자는 공언公彦이며 본관은 연안, 영의정 김전金詮의 증손이다. 1597년(선조30) 별시문과에 급제, 1602년 이조정랑 때 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목대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5)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인목대비 소생)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무고를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사賜死, 1616년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의 아들 군수 래崍와 진사 규珪, 14세의 선瑄 등 3명도 역적의 아들이라고 죽였다. 손자 천석天錫만이 화를 면하고 부인 노씨盧氏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노씨부인은 곧 인목대비의 어머니가 된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탁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도민은 이를 모주母酒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찾아와 “부부인府夫人의 술이 대단히 맛이 좋습니다.”하며 다투어 사서 마시니 주변에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제주목사 양호梁濩는 노씨부인에 대해 심한 박해와 모욕을 가했다. 다행히 기숙하는 집의 사람 전량全良이 그녀를 동정, 부인을 노씨에게 보내어 노역을 도왔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이 폐위되자 동년 3월 인조는 승지 정립鄭岦, 예조참의 목대흠睦大欽, 중관中官 김충립金忠立 등을 제주에 보내어 모셔 오도록 하였다. 삼남三南의 감사에게 호행護行하도록 하고 제주에 있을 때의 집주인 전량도 부부인府夫人과 동행하여 상경, 인조로부터 부부인을 잘 보살펴 준 은인이라고 하여 많은 상을 내려주고 또 첨사로 제수되었다.
 한편 부부인을 이유 없이 학대한 목사 양호는 파직되어 온양에 이르니 가도사 남일南佾의 당도, 어명에 의해 머리를 베고 그 머리는 제주로 보내어 관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노영희盧永禧:생몰년 미상, 고려 원종 때의 문신. 삼별초로서 제주에서 항거. 1270년(원종11) 원종이 몽고와의 화평 교섭에 의하여 출륙환도出陸還都를 결정하고 삼별초의 명단을 압수하자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로서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함께 궐기하였다.
이들은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받들어 왕으로 모시고 관부를 설치하여 반몽고·반개경 정부라는 태도를 명확히 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항전을 위하여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겼다. 이들은 한때 경상도·전라도 연안지방을 석권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이듬해 5월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진도가 궤멸되자, 살아남은 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인솔 아래 제주도로 들어가 계속 항전하였다.

노영섭
노영섭

▲노영섭盧永燮:1929(일제강점기)~1981, 월남 동포, 의사, 대학교수, 월남전越南戰에 참전,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자양紫陽리에서 노은호盧垠鎬와 어머니 양신화梁信化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우려고 상경上京해 서울의대醫大를 재학 중에 38선이 막혀 귀향할 기회를 잃고, 외가의 재정 지원으로 다행하게도 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중앙대 약학藥學과와 해군海軍사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 및 충북대학교 약학과 교수를 지냈다.
이어 국립중앙의료원과 국립공주병원 의무과장을 역임하고, 1966년 보사부保社部 파견 의료과장으로 월남전越南戰에 참전, 복무를 마쳐 이후 제주도로 들어와 제주도립병원장을 지내고 ‘제주-성안’에 고려高麗병원을 창업하여 뛰어난 의술로 명성을 날렸다.
내조자인 제주도의원 고병효高柄孝의 맏딸 고정인高貞仁을 만나 아들 지환知煥과 손자 경태京泰로 대를 이었다. 명命이 그만이어서 향년 53세로 별세하니 애월읍 고성리<항바두리-골>에 안장하여 오라리<오라위> 한학자 문연文淵 고경수高景洙가 비갈문碑碣文을 써서 건립하였다.
대전시에 있는 첨단생산장비 연구본부 광응용기계연구실 선임연구원 공학박사 노지환盧知煥의 선친.
▲노원섭盧元燮:1877(고종14)~1950, 충청남도의 의병활동. 의병장, 제주도 추자에 온 유배인. 자는 대재大哉,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만경이며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동곡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150여 명의 의병을 인솔, 금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의병을 안의安義로 옮겨 월성산, 운장산에서 적을 연파하였다. 1908년 무주·진산·고산·고부등지에서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동년 2월 연산連山에서 붙잡혀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제주도 추자로 유배되었다.
1910년 특사령으로 사면, 귀향 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나 남경에서 붙잡혀서 2년간 복역하였다. 다시 귀향하여 독립군 군자금을 몰래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반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은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광복이 되자 초대 공주 유도회장儒道會長과 공주군 민족정기단장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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