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내포 인근에 다양한 조형물…노천박물관 방불
고내포 인근에 다양한 조형물…노천박물관 방불
  • 제주일보
  • 승인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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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포 방호소 주변에 4개 과원 조성 기록 전해져
일본 건너간 주민들, 고향 그리며 활발한 친목 활동
제주시 애월읍 고내포구 인근에 조성된 다락빌레 쉼터 전경.
제주시 애월읍 고내포구 인근에 조성된 다락빌레 쉼터 전경.

고내봉 남쪽 지경에는 특이하게도 대나무로 둘러싸인 경작지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감귤밭인 과원에는 방풍림과 경계목으로 대나무를 식재했었다. 이로 미루어 고내봉 깊은 곳에 대나무로 둘러싸인 밭 주변이 안내판에 적힌 관립과원이었다고 여겨진다.

고내과원 추정지.
고내과원 추정지.

관립 고내과원 터(추정지)

오래전부터 감귤을 재배해 온 제주에서는, 특히 조선시대 들어와 이수동 목사(1526-1528)가 나라에 진상품을 올리기 위해 다섯 방호소에 관원들을 설치하여 43개 과원에서 감귤을 재배하게 하였다. 다섯 방호소으로는, 도근천포·조천포·김녕포(별방포애월포·명월포 방호소를 말한다. 그곳에 주둔하는 병정들에게 겸하여 지키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안해졌다고 고서들은 전한다. 애월포 방호소 인근의 과원에는 엄장남과원·중과원·북과원·가락과원이 있었다. 또한, 군사가 주둔한 애월진 소속인 고내봉수가 위치한 고내봉에서도 감귤재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圍以竹樹 以護風災(위이죽수 이호풍재) 즉 대나무를 심어 (과원에 부는) 바람의 재앙을 막았다는 기록이 이를 대변해준다 하겠다.

노천박물관 같은 다락빌레 쉼터

다락빌레는 제주시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애월항으로 향하다 보면 고내포구 내려가기 전 나타나는 높은 동산의 이름이다. 바다와 한라산이 어울린 이곳에 제주의 역사문화가 묻어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들어서 노천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이곳은 부엌에 물건을 넣는 다락처럼 암반이 널리 깔려서 다락빌레라고 불리고 있다. 또한, 이곳은 자연과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어울려 즐기며 쉬었던 곳이다. 빌레는 제주어로 너럭바위들로 채워진 지역을 의미한다. 다락빌레라는 지명에서 다락을 한자로 다락(多樂)이라 쓰일 많큼 다양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삼별초항쟁을 주도한 김통정장군과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 장군을 상징하는 涯月邑境 抗蒙滅胡(애월읍경 항몽멸호)의 땅이라는 조형물과, 고내리 바다밭을 경작하는 해녀상, 재일 교내리 시혜 불망비, 혼자는 외로워 짝 찾는 방사탑, 그리고 바닷가 기정(절벽)에 용왕을 닮은 거대한 기암절벽이 펼쳐져 있다.

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
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

▲在日 高內人 施惠 不忘碑(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

재일교포 수가 제주에서 가장 많은 마을이 고내리이리라. 넓은 바다와 고내봉 그리고 넓지 않은 경작지 등 여러 자연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삶을 이어가야 했던 고내리의 선인들은 개척정신이 남달랐을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고내리 선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고향을 위하는 친목회를 조직하여 다양한 사업들을 행해왔다. 그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 고내리에서는 이곳에 커다란 불망비를 2002년에 세웠다. 불망비의 음각된 글씨들이 시간이 흘러 보이지 않아 고내리사무소에서 관련 내용을 구하여 아래와 같이 주요 내용을 추려 실었다.

, 언제였던가. 한일합방 망국의 한, 북받치는 설움 안고 가난을 이기려 고향 땅을 뜨던 날이. 물설고 낮설은 일본 땅에 뿌리내려 살아온 세월은 어느덧 100여년을 헤아리네.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 없으니 가슴에 절절했던 그 한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어찌 잊으리. 자식들 키우랴, 생활고를 이겨내랴. 바당들어 좀녀질하던 어머니, 빌레왓을 갈아엎던 아버지를 그리며 억척스레 살아낸 타국살이 아니던가. 수만리 머나먼 고향마을과 부모형제, 친지 동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필설로 이루다 표현할 수 있으랴. 외로움과 그리움과 눈물과 한숨을. 애향의 정신과 향우간의 상부상조로 이겨낸 삶이었음을. 어찌 재일본 향우들의 고향에 대한 큰 사랑을 한시라도 잊을 수 있으랴. 다락동산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파도는 오늘도 푸르게 더욱 푸르게 굽이치네. 재일본 고내리 향우들의 크나큰 희생과 깊고 넓은 공덕을 가슴에 새기면서 마음과 정성을 담아 불망의 비()를 우뚝 세운다.

재일본 고내리친목회 회원 명부 표지
재일본 고내리친목회 회원 명부 표지

재일본 고내리친목회 회원 명부

이 사진은 여느 마을에서 볼 수 없는, 현재 고내리 거주자보다 많은 재일본 고내리 친목회원의 이름과 연락처 등이 기재된 명부의 겉표지이다. 경작지가 적은 고내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오두만씨부터 마을을 떠나 일본으로 터전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후 해마다 10명 내외의 고내리 사람들이 일본으로 삶의 현장을 옮겨야 했다. 1928년까지 고내리 출신 121명이 일본으로 삶의 현장을 옮겼으며 이후 1930년 이후에도 400여 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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