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양성하며 조국의 자유 위해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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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도인권
노정, 하멜 일행 38명 호송
다케나카, 통조림공장 운영
더슨, 제주 천주교회서 근무  
도고, 러시아함대 추격 대파
도인권,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라이언, 천주교 항일활동 주도
제주시 동문로터리 동쪽 옛 공신정拱辰亭 터에 도인권 목사의 선교 활동을 기려 ‘도인권공적비’가 세워졌었다.(현 제주지방기상청)
제주시 동문로터리 동쪽 옛 공신정拱辰亭 터에 도인권 목사의 선교 활동을 기려 ‘도인권공적비’가 세워졌었다.(현 제주지방기상청)

노정盧錠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제주목사. 1651(효종2) 7, 홍우량洪宇亮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538월에 떠나니 주민들이 그에 대한 공적비를 세웠다. 당시 제주목사는 이원진李元鎭이다.

노정이 판관으로 재임 중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과 함께 표도한 화란 사람 하멜 일행을 경계하며 보호하였다. 1669(현종10) 9, 이인李湮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고 16725, 전라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떠났다.

1653(효종4) 여름 화란和蘭 상선이 대정현 남해안에 파선 표착하였을 때 목사 이원진의 명을 받아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려 조난 상황을 조사 문정한 후 하멜 등 38명을 주성州城에까지 호송해 온 일이 있었다. 또 노정은 1669(현종10) 7월에 제주목사로 도임, 이듬해부터 해마다 흉년과 악질惡疾이 유행하자 기역飢疫구호에 진력하였다.

이 무렵 2·3년간은 흉년과 질병이 창궐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였던 때이다. 1671(현종12) 2월 기민수가 근 3만 명, 아사자가 3,450여 명이고 3월의 기민수가 근 3만 명, 아사자가 3,450여 명이고 3월의 기민수가 근 4만 명, 아사자·동사자가 2,500여 명이었다. 16721월부터 3월까지 여역癘疫과 기근으로 5,070여 명이나 사망하였다.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郞1892~?, 일본의 사업가. 제주 한림읍 옹포리의 통조림공장 사장. 일본 교토<京都>시 동산구東山區 태생으로 선대로부터 제주도를 개척한 경험이 있다.

어릴 때 교토부립<京都府立>수산강습소에서 배우고 1926년 제주도로 건너와 부친의 유업을 이어 쇠고기 통조림업에 투신하였다.

대목장의 계획, 유제품乳製品의 연구 등으로 크게 성공하고, 제주도 한림읍 옹포리에서 다케나카<竹中> 통조림공장과 전남 나주읍에서 다케나카<竹中>통조림공장을 창업, 그리고 경남 진주군晋州郡의 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왕성한 사업의욕을 과시하였다. 특히 제충국除虫菊의 재배와 구림프스의 재배에 이르기까지 장려하고 또 감저·백합·토마토·아스파라가스 등의 보급에 힘썼다.

수산방면에도 착안하여 청어통조림으로 호평을 받았다. 식민지시대에 일본인으로서 제주에서 가장 크게 사업을 펼쳐 도사島司·축산동업조합·수산회·농회·전남도지사·일본산업협회 총재·중앙축산회장 등으로부터 몇 차례 표창을 받았다.

더슨

더슨1905~1989, 신부, ‘더슨’ Dawson, Patrick은 제주도 천주교 신도 및 신부의 항일활동. 한국 성씨로 손신부. 본명은 파트릭 더슨(Dawson, Patrick.). 영국 아일랜드 토니골주데타케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아일랜드 신학교를 졸업, 아일랜드 콜롬반 선교사회宣敎師會의 선교사가 되었다.

19344월 조선 주재 신부로 명을 받아 제주시 삼도리 남문통 입구에 소재한 제주 천주교회(제주중앙성당)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동양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제주도 천주교의 항일 활동은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D.) 등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을 경우, 동양에서 천주교의 포교는 불가능해지고 서양인은 동양 각처에서 쫓겨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39년부터 제주 천주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신문과 라디오 방송이 항상 일본의 전과를 과대하게 보도되는데 불만을 품고 일본의 불공정한 보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전쟁 중인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의 항일 활동을 막기 위해 194110월 신부들 세 사람과 신도 35명을 구속 조사하였다.

19435, 도내의 여러 성당의 담당자 즉 재산 관리자의 자리에서 서양인 신부들은 축출당하여 후일 강원도 삼척 성당 신부로도 있었다. 일제는 일본 사람 하다<波多野治>와 와키다<脇田淺五郞> 등의 이름으로 성당의 명의를 변경 수속하여 천주교를 일본화 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815일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일본인. 생몰년 미상. 일본 해군 제독.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겨 10년 뒤 1904(광무8)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 바르치크함대가 인도양을 거쳐 제주 바다로 향하는 것을 탐지한 해군제독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부하를 소섬으로, 또 수병 후쿠다[福田庄吉] 56명은 모슬봉에 보내 초소를 지어 러시아 함대의 진로를 정찰시켰다.

이를 연평리 5소임은 군수 홍우순洪友淳에게, 또 하모下摹리 기찰장譏察將 박기영朴基永은 대정군수에게, 또 위로 목사 홍종우洪鍾宇에게 보고했다. 러시아 함대[露艦隊]가 북상한다는 우도 초소의 보고를 받은 도고 제독은 진해만鎭海彎에 숨겨둔 함대로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도고[東鄕]는 한국의 이순신, 영국의 넬슨과 함께 세계 3대 해군 명장이라고 한다.

한편 1905년 만주滿洲의 여순旅順 전투에서 일본 육군대장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가 러시아 장군[露將]의 항복을 받자 일본은 강권으로 을사조약을 맺었다. 고로 19063월에 제주도 최초로 우도등대가 정상에 설치되었다.

도인권都寅權1880(고종17)~1969,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원 및 시베리아에서의 항일활동. 감리교 목사, 6·25 전쟁 때 제주도에 온 피난민.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피난을 와서 19573월까지 7년에 걸쳐 7개의 교회를 신설하여 포교에 열의를 다하였다.

평안도 용강 출신. 1904년 무관학교 군사특과를 졸업한 뒤 교관으로 임관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부터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황해도 재령에 양원학교를 중심으로 학무회를 조직하여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가 양성에 힘썼고, 고향인 용강에 충일학교와 사범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재령의 문창학교 교장을 지냈고, 안악의 양산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서 김구金九와 만나면서 독립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191012월 안중근安重根의 종제 명근明根의 독립 운동 자금 모금 사건이 탄로되자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때 10년 형을 선고받고 6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8년 상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 의정원 부의장, 상해 거류민 단장 등을 역임했다.

1940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간도 연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광복이 되자 곧 귀국하여 옹진 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제주성 동문밧 동문로타리 동쪽 옛 공신정拱辰亭 터에 그의 선교활동을 기려 <도인권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라이언

라이언1908~1971, ‘라이언’ Ryan, Thomas.D은 신부, 제주도 천주교의 신도 및 신부의 항일활동. 신부. 본명은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Ryan, Thomas D.), 한국식 성씨로 나신부라고 불렀다. 영국 메이요주크로즈 옴라이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를 믿어 센트 콜롬반 신학교神學校를 졸업, 아일랜드 콜롬반 선교회의 선교사가 되었다.

19344월 산남 서귀포 천주교회 소재의 홍로천주교회(일명 홍로성당) 주재 신부로 부임하였으며 제주 성내 남문로 입구의 천주교 성당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제주도 천주교의 항일 활동은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 D.) 등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을 경우, 동양에서 천주교의 포교는 불가능해지고 서양인은 동양 각처에서 쫓겨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38년 중·일 전쟁이 한창일 때 누차에 걸쳐 신도들에게 당시의 보도와 달리 일본의 패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알렸다. 더구나 1941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에 의하여 성당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815일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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