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타국의 전쟁 속에서 인류애 실천한 참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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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6·25 전쟁서 고아 지켜
롱베, 19세기 제주 탐방기 기술
마리이, 제주 표류 첫 서양인
마사이 가징, 항복 문서 서명
마수다 이치지, 제주 지리 연구
한국보육원에서 미군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위문하고 있다. 사진 속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이 황온순 원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의 안전을 맡은 부레이즈델 러셀 중령은 1951년 12월 고아들을 제주로 옮겼고, 이때 한국보육원이 탄생됐다. 제주도민들은 한국보육원을 가리켜 UN의 지원으로 설립됐다고 해서 UN고아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한국보육원에서 미군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위문하고 있다. 사진 속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이 황온순 원장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의 안전을 맡은 부레이즈델 러셀 중령은 1951년 12월 고아들을 제주로 옮겼고, 이때 한국보육원이 탄생됐다. 제주도민들은 한국보육원을 가리켜 UN의 지원으로 설립됐다고 해서 UN고아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러셀브레이즈델-러셀’(Brasedel Russell)은 미군(美軍) 중령, 미 제5공군 군목.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전쟁고아를 제주도로 공수 시켜 인류애를 실천한 미국 군인

뉴욕 태생으로 19506·25 전쟁이 일어나 서울에서 후퇴하자 한국을 돕기 위하여 UN군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미 제5군단 군목으로 참전, 서울을 탈환하였으나 또 중공군의 개입으로 같은 해 12월 북한에 의해 인민군에게 서울은 재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서울 철수 작전 때에 전쟁고아의 안전을 맡은 브레이즈델 중령은 새벽마다 트럭을 몰고 거리에 나가 오갈 곳 없는 고아 10~20명씩을 태워 왔다. 그렇게 모아 종로(鍾路)초등학교의 건물에 수용한 인원이 1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으로부터 인천항에 배 한 척을 대기 시켜 놓겠다.”는 말을 듣고 트럭으로 아이들을 인천으로 실어 옮겼다. 그러나 대기 중인 배는 시멘트를 가득 실은 낡은 것이어서 아이들을 태우기는 어려웠다. 그는 다시 서울에 주둔 중인 미 공군본부로 가서 로저스 준장에게 도움을 호소, 승낙을 받았다. 인천에서 다시 미 해군 군용 트럭 14대를 강제로 빌려 김포로 고아를 수송한 후 미군 수송기(C-54) 16대에 실어 제주도에 안착시켰다. 제주도 관계자의 도움으로 제주농업고등학교에 임시 수용할 수 있었다. 1951년 이들 고아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배려로 사회사업가 황온순(黃溫順, 50)에게 넘겨져 이때 한국보육원이 탄생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5개월이 지나 일본에 있는 사령부로 발령되면서 한국을 떠났으나 1952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옷·식료품·의약품 등을 갖고 제주로 두 차례나 찾아왔었다. 그는 1964년 전역한 뒤 뉴욕주의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70년대 말 퇴임하였다

롱배생몰년 미상, ‘롱배’(Longbey, Chaille.)는 프랑스 태생인 한말 미국의 외교관. 1888년에 제주 탐방기를 기술한 외국인.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미국 정부에 초빙되어 188710월부터 주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 부임하여 만 2년 동안 재임하였다. 그는 당시 유럽지역의 우수한 학술연구단체인 이집트(Egypte)연구회 회원으로, 또 노르망디(Normand)지리학회 회원으로 많은 연구업적을 쌓아서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외교관이란 직업을 택하여 한국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 세레 롱베는 1889년 외교관의 임기를 마치고 뉴욕으로 귀임 도중 고향 파리에 2주간 머물면서 한국 체제 시 메모한 것을 불어로 정리하여 글을 지었다. 같은 해 노르망디 지리학회에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부산·원산·블라디보스톡에 관한 여행기록이란 제목으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다시 1891년 수정 보완되어 이집트연구회에 꼬레 또는 조선-아침의 맑은 땅으로 보고되고 이어 1894년 파리에서 역시 같은 제목 ‘La Coree or Tchosen - La Terre Ducalme Matinal’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 10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907년 계측한 제주도 지도와 많은 삽화를 게재, 독자의 흥미를 끌게 하고 있다. 17세기 중엽 이 섬에 표착했던 헨드린 하멜의 표류기가 있었던 이후 처음으로 제주도를 그 나름의 예리한 시각으로 서방 세계에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 지식인에 의한 제주도에 관한 기술이 흔하지 않았는데 이 기술은 특히 학자이며 외교관에 의해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의 1개 포수였던 하멜과는 차별화되어야 할 것이다

마리이(馬里伊)생몰년 미상, 제주에 표류된 첫 서양사람. 1582(선조15) 가을에 명나라 복건성(福建省) 사람 진원경(陳元敬) 등과 동양인 막생가(莫生哥) 및 서양인 마리이(馬里伊) 등이 동승하여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대정현 차귀도(遮歸島) 근처에서 파선되었다. 우리 군인에 의해 구제된 일행은 서울로 호송된 후 진하사(進賀使) 정탁(鄭琢)에 의해 다시 명나라로 돌려보내졌다. 이 일이 기록상으로 처음 나타난 서양인의 표류이다.

어승생악 정상에 있는 일본군의 동굴 진지.
어승생악 정상에 있는 일본군의 동굴 진지.

마사이-가징(正井義人)일본인, 일본 육군 중장. 마사이-가징(正井義人)은 일제 말기 대미전(對美戰)을 수행하기 위해 19454월 애월면 관내에 주둔한 일본 육군 제58군 소속 제121사단(일명 에이코(榮光) 사단) 사단장이었다. 사단 병력은 15301명이고 애월읍 바라미-오름을 중심으로 애월면 관내 요지마다 주둔한 상태였다

제주 주둔군 제58군은 6~7만 병력으로 직할부대는 도리데부대라 한다. 58군 사령관은 도야마-노부로(遠山 登) 중장이며 제주농업학교를 본부로 두고 전승국(戰勝國) 미군에 재출할 항복문서에 서명한 당사자이다. 야전사령부는 한라산 바로 북쪽 어승생-오름을 요새화한 상태였다.

마수다-이치지1885~?, 일본 지리학자. ‘마수다-이치지’(桝田一二)의 연구자료는 2005216일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되었음을 밝혀둔다

마수다-이치지’(桝田一二)1885(명치 28) 도쿠시마현(德島縣)에서 태어나 1915도쿠시마현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도쿄고등사범 지리과 야마자키-나오마사(山崎直方)’·‘다나카-케이지(田中啓爾)’ 두 교수 밑에서 조교로 근무했다. 1924년 난관(難關)인 중등교원 검정시험(지리과)에 합격, 그 뒤에 도쿄고등사범 연구과(지리학)에 들어가 19293월 졸업, 그해 4월부터 발족한 도쿄문리대 지리학 교실에 정식 조교로 채용되었다.  

다나카교수 밑에서 학문적인 지도를 혼자서 완벽하게 처리하고 교실의 연구·교육의 환경을 정비했다. ‘마수다는 그 학문에 있어서 다나카의 영향 아래 근대지지학을 충실히 승계했지만 문제의 조사·연구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훌륭한 성과를 올렸는데, 그 최대의 것이 제주도연구’(濟州島硏究)이다

제주도를 처음 찾은 것은 1930마수다35세의 여름의 일로 이때 다나카 교수와 동행하여 약 1개월간 조선반도를 돌아봤는데 제주도 산지항(山地港)으로 건너가 거의 1주일간 체재하면서 섬의 대부분을 살폈다. 2년 후인 1932년에도 다시 단기간 도도(渡島)하여 일부 지역을 돌았다.

1933(마수다 38)부터는 계획을 세워 5년 동안 매년 40일씩 200일에 걸쳐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지리학계의 관심이 만주(滿洲, 중국 동북부)나 중국대륙 본토·동남아시아 등으로 기울어지고 있던 이 시기에 마수다30대부터 40대까지의 아직은 체력·기력 모두가 괜찮을때 계획대로 조사를 실행했다.

1933년 여름의 약 40일간의 조사, 34년 여름 기미가요마루’(君代丸)으로의 도도(渡島), 1935년 겨울·여름 두 번의 조사, 36·37·38년 여름의 조사 등등 1930년부터 38년까지 합계 8회에 이른 현지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렇듯 1930년대 오로지 제주도에만 집착한 마수다의 우직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태도가 있었기에 일련의 제주도 연구가 이뤄졌으며 이것들은 지리학계에 있어서 지금은 외국이 되어버린 한 지역의 상세한 지리적 연구로서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일 것이다.

1940년대 이후 제주도는 제2차 대전의 전화를 입은 일은 별로 없었지만 전쟁 중에는 지역의 조사연구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특히 1948년의 제주도 4·3사건’ 50년의 ‘6·25 조선 전쟁등이 잇따라 일어나 섬의 상황은 크게 변동했고 현지 조사도 불가능했다. 그 후 도내의 사회·경제정세가 전전(戰前)과는 확연히 발전했지만 전대(前代)의 실정을 아는 사람들도 적어져 문헌이나 그 밖의 것도 별로 많지 않다. 따라서 마수다논문의 존재는 말하자면 옛 시절의 제주도를 알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단서를 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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