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빛
문명의 빛
  • 제주일보
  • 승인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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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수필가·시인

올핸 비 오는 날이 많았다. 집 안 곳곳이 눅눅하다. 습기 제거제를 이용하고 제습기와 에어컨의 힘도 빌린다.

햇빛이 얼굴을 내미는 낮보다 밤은 더하다. 기온이라도 높을 때면 온몸으로 감겨 오는 습기를 털어내고 싶어진다. 현관을 나섰다. 성능 좋은 LED 손전등도 잊지 않고 챙겼다.

추석엔 비 날씨가 예보되어선지 달도 별도 구름 뒤로 숨었다. 구름만 제 세상인 듯 천지를 뒤덮었다. 하지만 손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사위가 시야에 또렷하다. 잠을 청하는 듯한 경운기, 그 옆에 숨죽인 어린 무, 배추, 엊그제 파종한 시금치도 흙을 뚫고 싹을 삐죽이 내민 모습도 보인다.

소년 시절부터 지켜 온 고향이다. 그때는 이렇게 구름이 잔뜩 낀 날엔 골목길을 걷는 것조차 어려웠다. 길가에 세워둔 마차에 부딪쳐 이마에 주먹만 한 혹을 달았던 게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였겠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며 어째서 이렇게 밝은 건지 살폈다. 마을 길, 일주도로, 우회도로엔 일정한 거리마다 가로등이 켜져 있다. 읍내 중앙 마을이라지만 변화의 바람이 비교적 덜해 시골과 다름없다. 마을에서 조금 위쪽에 자리한 한적했던 우리 집 근처엔 이제야 다세대주택이 하나둘 들어서는 중이다. 간간이 사업체가 자리 잡은 곳에 간판 불 정도만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함덕해수욕장이 있어 그곳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빛이 구름에 스며들어 동쪽 하늘은 새벽이 오는 느낌이다. 서쪽 제주시에서 그보다 더 강한 빛을 구름으로 올려보내고 있다. 북쪽엔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켜놓은 어화가 강렬하다. 남쪽 한라산을 바라보니 거미줄처럼 만들어진 중산간 도로의 가로등, 제주대학, 병원, 사업체 건물에서도 전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 불빛들이 켜진 곳은 대낮처럼 밝겠다. 이곳까지 미치는 문명의 빛에 온난화란 걱정 하날 더 얹는다. 들었던 손전등은 켜 볼 기회조차 얻질 못하겠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터폰에 켜진 희미한 불빛이 나를 맞는다. 1층엔 3대의 냉장고가 고요한 밤 습기를 타고 흐르고 그 옆엔 제습기가 웅웅거리며 습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전등 스위치에 켜진 붉은 표시등도 여럿이다. 자동으로 켜지고 꺼지는 계단 전등을 등 뒤로 하며 3층에 다다랐다. 거실엔 조명 겸용인 디지털시계가 밝은 빛을 내고 냉장고, 보온밥통, 식기 건조기, 라디오의 채널도 눈으로 들어온다. 늘 대기해야 하는 컴퓨터 관련 불빛도 많다. 인터넷 박스, 모니터, 공유기, 그에 연결된 TV.

주변을 둘러보았다. 충전 중인 진공청소기, 핸드폰, 가스누설감지기도 제 할 몫에 충실하다. 전화기도 대기 전력이 필요하다. 모기잡이 전기장치, 칫솔 살균기, 에어컨도 리모컨을 누를 때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어야 한다.

대기전력을 줄이기 위해 곳곳에 스위치를 설치했건만 스위치를 아래로 누르는 건 한정된 전자레인지, 오븐, 세탁기 정도뿐이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밤이면 창으로 스미는 빛을 차단하기 위한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다. 한길 가엔 가로등에 잠을 못 이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농작물, 수탉도 새벽을 감지 못해선지 한밤중에 울기 일쑤다.

문명의 빛을 만들기 위해 화석연료가 밤새워 태워지며 열을 뿜는다. 지구 온난화는 세균 수를 늘리고 그를 숙주로 삼은 바이러스도 힘을 얻는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문명의 빛이 인간을 잡는 덫이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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