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의 삶과 삼별초의 역사를 품다
해녀의 삶과 삼별초의 역사를 품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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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륙금지에 수많은 남성 육지로
살아남기 위한 직업군, 해녀 탄생
마을 곳곳에 몽고·왜구 맞선 흔적
가장 오래된 초상화 ‘귤수소조’
용천수가 있던 우물터(또는 불턱)주변 환해장성 흔적. 고내해안에 환해장성이 쌓여진 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 사이로 추정된다. 해녀들이 사용한 우물터인지 용천수에서 물을 길어 날랐던 공동우물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용천수가 있던 우물터(또는 불턱)주변 환해장성 흔적. 고내해안에 환해장성이 쌓여진 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 사이로 추정된다. 해녀들이 사용한 우물터인지 용천수에서 물을 길어 날랐던 공동우물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고내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고내마을 사람들은 바다밭을 일구며 생활해왔기에 해녀 생활이 곧 삶이었다. 제주 해녀는 강인한 제주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이에 제주 해녀의 역사문화이기도 한 출륙금지령(1629-1823)에 대해 덧붙인다

제주해녀상(濟州海女像)과 제주 해녀의 오래된 역사

관리들의 가렴주구 등으로 삶이 더욱 어려워지자 선인들은 제주를 떠나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제주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조정으로 보내는 특산물의 양이 줄어들고 제주도를 방어할 병정이 부족해 갔다. 급기야 1629(인조 7) 제주 사람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이후 200년간 행해진 금지령으로 제주 사람들은 육지와의 직접 교류가 불가능했고, 육지에서 온 상인들을 통해서만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해상무역을 통해 발달했던 조선술과 항해술은 단절되고 제주해안가에는 테우만이 남겨졌다. 제주섬 전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다.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 의하면, 배에 절대 싣지 못하는 금지 품목에 제주 백성이 포함될 정도였다. 다수의 남자가 탈출하자 여성들은 바다에 뜬 감옥에 볼모로 잡힌 가련한 신세가 돼버렸다. 하지만 출륙금지령은 오히려 더 많은 제주 사람들을 육지로 내몰았다. 감옥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무단탈출이었다.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탈출한 제주 선인들은 주로 남해안에 정착했다. ‘근년에 제주 세 고을의 인민들이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 전라도 바닷가 연변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천여 명이다라고 난중일기 등은 전한다

제주해녀상
제주해녀상

제주도 포구에는 테우만이 해변을 맴돌고, 육지를 왕래할 수 있는 배라곤 한 달에 한 번씩 진상품을 실어 나르는 배가 전부였다. 경래관의 토색질은 조선 팔도 어느 곳보다 극심했다. 수령의 작폐를 직접 조정에 고변하려 해도 출륙을 금하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제주민에게 200년 세월은 단절과 억압의 슬픈 역사였다. 수탈을 피해 육지로 간 제주 포작(鮑作)인은 1만여 명에 이른다고 제주기행의 저자 주강현은 말한다. 여기에 해난사고로 죽은 남자들이 연간 수백 명이 넘는 까닭에 늘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었다. 제주의 여성은 남자 어부인 포작인의 공백을 몸으로 때워야 했다. 그리하여 해녀라는 직업군이 제주도에 탄생한다.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하는 제주 해녀의 탄생 배경에 깔린 슬픈 역사이다. 포작인이란 제주를 탈출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비롯하여 황해도 등지로 숨어 들어가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삼고 연안을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제주 출신 남자 어부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잡아 진상하기도 했고, 임진왜란에서는 물길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도 맡았다. 출륙금지령이 해제된 1823(순조 23) 이후인 1884년 제주 인구는 89844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19세기 말까지 제주 인구는 10만 명을 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애월읍경 항몽멸호(涯月邑境 抗蒙滅胡)의 땅 표지석.
애월읍경 항몽멸호(涯月邑境 抗蒙滅胡)의 땅 표지석.

애월읍에는 1270년부터 김통정 장군의 삼별초 부대가 상륙하여 쌓은 항파두리성과 1374년 목호의 난 진압차 명월포와 애월포 등지로 상륙한 최영 장군 부대가 전승을 거둔 새별오름 등 제주의 역사문화가 깃든 곳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애월읍의 중간지점인 이곳 다락빌레에 삼별초를 상징하는 인물인 김통정 장군석과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 장군석을 조형물로 전시하고 있다. 또한, 애월읍경 항몽멸호(涯月邑境 抗蒙滅胡)의 땅이란 표지석이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한자성어인 涯月邑境(애월읍경)이란 고내 지경을 가리키는 말로, 抗蒙滅胡(항몽멸호)는 몽고에 항쟁하고 목호의 난을 멸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의미로 작명한 듯하다. 항몽멸호비는 2011년 주민자치센터 특성화 사업인 삼별초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동산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애월읍 출신인 김찬흡 향토사학자의 고증을 거쳐 설치됐다

고내현과 환해장성 그리고 불턱 또는 공동우물 터

고내현은 고내리의 옛 이름이다. 1653년 편찬한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등에 의하면, 1270(고려 원종 11)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서 귀일촌에 항파두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고, 외곽성으로 애월에 목성을 구축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4(태종 4) 고내와 명월에 왜구가 침입해 가축과 재물을 약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내리에는 고려 때부터 사람이 살았고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외적을 방어하는 현촌으로 설촌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1270년대부터 쌓은 것으로 알려진 환해장성이 고내 해안 도처에 남아 있다. 이곳 환해장성이 쌓여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던 시기인 고려말에서 조선 초 사이로 추정된다. 축조방식은 막돌 허튼층 쌓기에 잔돌 끼움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용천수가 있던 우물터(또는 불턱) 주변에 환해장성 흔적이 남아있다. 애월초등학교와 고내리 포구 중간지점에도 환해장성이 남아있다. 그동안 파괴된 환해장성을 복원하여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문화재를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고내리 바닷가에는 환해장성과 불턱의 어울림이 있다. 하지만 안내의 글이 없어 해녀들이 사용한 불턱인지 또는 용천수에서 물을 길어 날랐던 공동우물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 근처의 구축물들은 근대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연륜과 조형미가 빼어나다. 고증을 거치고 시멘트를 걷어내어 적절하게 복원이 된다면,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해안가의 명물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의 주인공 고내 출신 문백민.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의 주인공 고내 출신 문백민.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의 주인공은 고내 출신 문백민

고내 출신 문백민의 초상화인 귤수소조(橘叟小照)는 제주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문백민은 애월 고내리 출신의 호장으로 제주성 안에 1000그루의 귤나무 과수원도 지닐 만큼 비교적 부유했고, 그릇이 매우 큰 인물이라 전한다. 이 작품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제작 배경과 제작연대, 초상화의 주인공을 그린 작가도 명확하다. 이 초상화는 제주 선인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이 초상화는 비단 바탕의 채색화로 규격은 68~36이며, 제주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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