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의 바람 맞으며 ‘폭풍의 언덕’을 걷다
북해의 바람 맞으며 ‘폭풍의 언덕’을 걷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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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국 횡단 Coast To Coast
3개 국립공원 관통…유럽의 속살 경험하는 영국 여행 진수
황무지·호수·헤더숲까지 독특한 자연 환경 아름다움 ‘눈길’
이영철 작가가 영국 섬 서해안인 아이리시 해를 출발한 지 15일 만에 섬의 동해안인 북해바다와 처음 조우하던 날의 풍경. CTC는 아이리시 해의 세인트비스에서 출발, 동쪽의 로빈후즈 베이까지 가는 여정이다.
이영철 작가가 영국 섬 서해안인 아이리시 해를 출발한 지 15일 만에 섬의 동해안인 북해바다와 처음 조우하던 날의 풍경. CTC는 아이리시 해의 세인트비스에서 출발, 동쪽의 로빈후즈 베이까지 가는 여정이다.

영국의 허리인 잉글랜드 북부지방을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횡단하는 도보 여행길이 있다. ‘해안에서 해안까지라는 의미를 담은 ‘Coast to Coast Walk’가 길 이름이고, 줄여서 CTC라 부른다. 미국 스미소니언 매거진의 세계 10대 도보여행길(10 Great Walks of the World)’ 기사에서 세 번째에 랭크되기도 한만큼 유럽에선 꽤나 유명한 트레일이다.

영국을 걷는다는 건 런던 등 대도시 관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싱그러운 초원과 능선을 지나고 나면 19세기 유물 같은 시골 가옥들을 만나곤 한다. 여행작가 앨프리드 웨인라이트가 반세기 전에 개척해 세상에 알렸다.

영국의 서해 바다인 아이리시 해의 세인트비스에서 출발, 동쪽을 바라보며 15일 걷고 나면 광활한 북해 바다 앞 로빈후즈 베이에서 길이 끝난다. 수백 년 전부터 있어온 여러 갈래의 길들이 한 여행가의 열정 덕에 하나로 묶여 CTC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CTC의 가장 큰 매력은 영국 정부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세 개의 국립공원을 연이어 관통한다는 점이다. 잉글랜드 서부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중부의 요크셔 데일스 그리고 동부의 노스요크 무어스가 섬의 허리를 감싸며 두터운 벨트처럼 연결되어 있다. 세 지역은 저마다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가 담긴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문명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만개되기까지는 영국의 역할도 컸다. 그 섬의 가운데 허리 부분을 두 발로 뚜벅뚜벅 밟으며 횡단하는 CTC 트레킹은 따라서 유럽의 속살까지 경험하는 영국 여행의 진수나 다름없다.

1단계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105)

세인트비스는 잉글랜드 북부 해안에 위치한다. 컴브리아주 서쪽 끝에서 아이리시해에 면한 이 자그마한 어촌 마을이 영국 횡단 CTC의 출발지이다. 마을 기찻길을 벗어나 해안 절벽을 넘어서면 광대한 호수 지역인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펼쳐진다

19세기 영국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신의 고향인 이 지역을 인간이 발견한 가장 사랑스러운 땅이라고 극찬했다. 트레킹 초기 에너데일 워터에서 시작해 해발 500m에 있는 산정호수인 앵글탄 등 5일 동안 매일 한두 개의 산을 넘고 호수를 지나는 여정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20개 호수 중 여섯 번째 넓이인 하웨스 워터를 산 정상에서 내려다볼 때는 옥황상제가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볼 때의 느낌이 그와 같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런던과 글래스고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종단 철길이 지나는 샤프 마을을 가로질러 벗어나면서 호수 지역은 끝나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 무어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담길을 걷고 있는 트레커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 무어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담길을 걷고 있는 트레커들.

2단계 요크셔 데일스(Yorkshire Dales, 112

두 번째 국립공원인 요크셔 데일스에 들어서면 호수가 많고 산악 지대였던 레이크 디스트릭트와는 지세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방은 거침없이 펼쳐진 황야와 그 너머 지평선뿐이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인 무어랜드(moorland)’가 시작되는 것이다. 초원을 뒤덮고 있는 잡초와 야생화들은 바람 따위는 면역이 됐다는 듯 대지에 바싹 붙어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 잉글랜드 황무지 무어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광활한 황야와 함께 수많은 계곡과 높고 낮은 구릉으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요크셔 데일스는 신이 내린 땅이라 불리면서 매년 8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곳이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켈드와 리스 같은 작은 시골 마을은 물론 커비 스티븐과 리치먼드 같은 중세 도시들도 이 구간에서 만날 수 있다. 영국 내륙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가장 다양하게 품고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 무어 지역에서 만나는 헤더(Heather)꽃 벌판.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 무어 지역에서 만나는 헤더(Heather)꽃 벌판.

3단계 노스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 98)

노스요크 무어스는 아름다운 야생화인 헤더가 자생하는 가장 넓은 지역이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 꽃밭이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형형색색의 들꽃들로 이뤄진 덤불숲이다. 보라색 헤더의 물결이 걷는 이들의 오감을 압도한다. 서른 살의 짧은 생을 살다 간 작가 에밀리 브론테와 그녀 자매들의 삶의 터전도 이 지역이었고, 두 자매가 그려 낸 두 편의 슬픈 이야기의 배경도 이곳 요크셔의 무어랜드였다. 명작 폭풍의 언덕제인 에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토양이었다. 무어랜드의 거센 바람에 맞서며 보랏빛 헤더 꽃밭을 걷는 동안, 소설 폭풍의 언덕속 남녀 주인공이 함께 말 달리던 슬픈 환영과 마주칠 수도 있다.

칼톤 무어 정상에서는 아이리시해를 떠난 지 십여 일 만에 섬의 반대편 바다를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넣는다. 자그마한 시골 역인 그로스먼트에서는 칙칙폭폭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와 조우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마지막 날 로빈후즈 베이에 도착해 북해 바다와 마주하면 주머니에서 조약돌 하나를 꺼내 바다 멀리 힘껏 던진다. 로빈후즈 베이까지 무사히 인도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첫날 세인트비스 해변에서 하나 주워 고이 간직한 조약돌이다.

<·사진=이영철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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