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하늘이 제주에 내린 선물…푸른 눈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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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문, 약탈 외교적 타결 시도
마츠다 이치지, 제주 지리학 연구
막산이, 조선 숙종때 전설적 장사
만성춘, 신축민란 주도 여성 장두
맥그린치, 60여 년 간 희생·봉사
1970년 10월 15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소재 이시돌목장의 농업기술원 준공식 모습. 사진 앞줄 서 네 번째가 건립자인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이다. 이 농업기술원은 뉴질랜드의 면양·종돈 및 기술지원에 힘입어 개원됐다. 이시돌목장은 가난한 제주도민들에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주기 위해 맥그린치 신부가 1961년 11월 성 이시돌의 이름을 따서 중앙실습목장을 건립한 것이 그 시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70년 10월 15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소재 이시돌목장의 농업기술원 준공식 모습. 사진 앞줄 서 네 번째가 건립자인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이다. 이 농업기술원은 뉴질랜드의 면양·종돈 및 기술지원에 힘입어 개원됐다. 이시돌목장은 가난한 제주도민들에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주기 위해 맥그린치 신부가 1961년 11월 성 이시돌의 이름을 따서 중앙실습목장을 건립한 것이 그 시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마종문馬鍾文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전라남도 구례군 태생, 이영재李榮載의 후임으로 정의현에 도임했다.

1891(고종28) 8월 일본 선박이 빙표(憑標)도 없이 이 땅에 정박하였는데 우리 어부들이 고기 낚기 하는 것을 탈취하고 타박(打縛)하여 물에 던지기도 하고 총검으로 인명을 많이 상처 나게 하였다.

민간에서 부녀자를 위협하여 양곡·의복·가축 등을 침탈하였다. 선린우호에 파탄을 일으키니 일본공사에 조회하여 외교적인 타결을 기대하였다.

마츠다-이치지1896(메이지 29)~1974, 일본의 지리학자. 제주의 지리학을 연구. 일본 도쿠지마(德島縣)에서 태어나 도쿠지마사범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1930년 도쿄(東京)문리과대학 지리학교실의 조수를 지냈다.

1930년 제주도에 들러 살핀 후 1933년부터 5년 동안 본격적인 답사를 실시, 매년 40일씩 현장 답사를 통해 연구했다.

제주도의 지형뿐만 아니라 농업·축산·임업·출가(出稼) 해녀 및 오사카(大阪)로의 제주도민의 이주 상황 등에 이르기까지 조사했다.

막산이(莫山伊)생몰년 미상, 숙종 때의 전설적인 장사(壯士). 대정현 중문리 이은성(李殷成, 1719년생) 집안의 노비.

중문리(-)무낭-’(집터) 좌수의 집안은 대 이은 부농(富農)이어서 초인적인 힘을 가진 막산이라는 종을 고용하고 있었다.

집이 기울어져 막산이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창천리 배염-(집터) 부자 강위빙(姜渭聘, 1643년생)의 후손 좌수 강도풍(姜道豊, 1696년생) 집안으로 옮겨, ‘-드르’(대평)의 논밭 만드는 일을 맡겼다.

강좌수는 그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 내 보내니 들판에 살면서 가축을 잡아먹어 폐해가 컸다. 창천리 창고-의 문사 진경억(秦慶億, 1761~1835)은 힘센 장사 10여 명을 뽑아 한달이나 조련(調練)을 시켜 -오름녹고-막산이의 집을 포위하여 이들을 퇴치(退治)하니 이후 폐해는 없어졌다.

막산이 전설은 제주도 각처에 남아있다.

필자가 살피건대 막산이 전설은 대정(大靜) 각처에 남아 있는데 산북 유수암(流水巖) 지경에도 남아 있다. 실존인물임은 분명하며 초인적인 장사로 과장하여 전설적인 인물로 포장된 듯하다.

만성춘滿城春()생몰년 미상, 신축(辛丑) 민란 여성 장두(狀頭), 신축민란(辛丑民亂)을 주도했던 여성 장두.

제주의 신축민란은 1901년에 일어났는데 이재수란(李在守亂)’이라고도 한다. 봉세관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천주교 선교 과정에서 빚어진 프랑스 신부들의 치외법권 남용, 신도들의 횡포가 제주사람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난리가 나면 도망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모여들고 관덕정 광장에 모여서 남성들은 가만히 있는데 성문을 열라고 소리를 쳐대고 외국 신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따지고 드는 당돌한 모습들이 김윤식의 일기 속음청사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528(음력 411) 그날의 급박한 상황을 속음청사에서 따라가 보자. 오전 10시에 성 안의 여자들이 모두 모이라고 외쳐대자 집집마다 뛰어나가는데 의파(義婆)와 월야(月夜)의 어미도 역시 끌려 뛰어나가는데 흰 수건에 막대기를 가지고 나갔다.

성안에서 문을 여는데 앞장을 선 김남학(金南學)을 민당(民黨)이 공을 세웠다고 여겨 선봉장으로 삼고 여자로서 선 두 사람은 퇴기(退妓) 만성춘(滿城春)과 만성월(滿城月)이었다. 전쟁이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성춘과 만성월은 죽기를 각오하고 성문을 여는 데 앞장섰다. 약자에 대한 정의감, 의협심이야말로 제주기녀의 가장 두드러진 기질이었다.

맥그린치1928~2018:제주에서 반세기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을 해 온 패트릭 J.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 아일랜드 출신인 맥그린치 신부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外邦宣敎會) 선교사 소속으로 천주교 한림공소(翰林公所) 신부로 부임하며 제주와 첫 인연을 맺었다. 한림읍 금악리 거문-오름중산간(中山間)을 개간해 1961년 성()이시돌목장을 설립, 제주도에 선진 축산업과 기술을 도입했다.

4·3사건과 6·25전쟁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농업인들의 경제자립을 위해 1960년 초반 개척농가를 조성했고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 ‘성이시돌요양원성이시돌복지의원 등을 운영했다.

특히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병원과 경로당, 요양원, 유치원, 청소년회관등 여러 복지시설을 설립·운영했다. ‘4H-클럽제주조직을 꾸리고 제주 최초의 지역신용협동조합인 한림신협(翰林信協)도 설립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적십자사상, 제주도문화상 등을 받았고 1973제주도명예도민증을 받았다.

애란(愛蘭) 대통령상 수상식은 2014430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대통령관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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