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마르지 않는 마을’이 겪은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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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애월읍 수산리
고려 원종 때 설촌 추정…주진가름터·진터 등 오래전 마을 증명
천연기념물 곰솔나무·할망당·진계백의 묘 등 역사유적도 많아
천연기념물 수령 500여 년의 수산봉 곰솔나무. 수산봉에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 붙여진 ‘수산’. 그리고 ‘수산’의 상징인 곰솔은 500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긴 세월을 견뎌낸 나뭇가지는 저수지에 드리워져 ‘물먹는 나무’로 불리고 있다.
천연기념물 수령 500여 년의 수산봉 곰솔나무. 수산봉에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 붙여진 ‘수산’. 그리고 ‘수산’의 상징인 곰솔은 500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긴 세월을 견뎌낸 나뭇가지는 저수지에 드리워져 ‘물먹는 나무’로 불리고 있다.

물미 또는 물메라고 불리는 수산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오래된 역사문화를 품고 있는 마을이다. 이름의 유래가 되는 수산봉은 정상에 샘이 있어 물메오름이라 불리어왔다.

수산리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사시사철 마르지 않은 샘이 있는 이곳에서 제주목사가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물메오름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바다를 감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수산봉 아래 동쪽에는 제주에서 가장 넓은 인공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1960년 저수지를 조성하기 이전에는 이곳에 70여 호의 동네가 있었다.

이산(離散)의 아픈 역사를 담은 호반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500여 년의 곰솔도 드리워져 있다. 심은 지 400여 년이 지났을 팽나무와 함께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터에는 서당이 있었다.

제단이 남아 있는 당동네에 위치한 본향당 터에는 할망당을 지키던 신목의 후손들이 더욱 짙은 녹음을 선물하고 있다. 할망당이 있던 이곳은 당카름으로도 불린다.

평화로를 달리다 만나는 한국마사회 제주경마장 지역은 오래전 수산리의 공동목장이었다. 애월읍 유수암리와 고성리 지경에 위치한 수산리 공동목장은 조선시대 국둔마(國屯馬)의 목양지로 제5소장 지대였으며, 일제강점기에서는 수산목장조합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광해임금 원년인 1609년 제주판관 김치가 방리를 정할 때 이 마을은 제주목 우면 수산촌(수산리)으로 정했다. 우면의 인구가 늘어 1798년 신우면과 구우면으로 나눈 이후에는 신우면 수산리로, 1935면 일제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신우면이 애월면으로 바뀜에 따라 애월면 수산리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산리 마을 풍경. 본동인 큰동네 위로 난 예원동 가는 길은 정겨운 시골길 풍경이다. 

수산리 설촌과 관련된 인물들

수산리는 1271(고려 원종 12) 삼별초 우두머리 김통정 장군이 입도하여 귀일현에 항파두리 내성과 외성을 축조하고 웅거하던 시대에 설촌된 것으로 여겨진다. 애월읍의 마을들은 이즈음에 설촌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산리 지명에 실린 진계백

수산리에는 또한 오래전에 설촌된 마을임을 증명하는 역사성을 띤 이름들이 계승되고 있다. 주진(住秦)가름터, 진터(秦趾), 진밭(秦田) 등이 그 이름들이다.

1374년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입도하기 전 이미 진씨의 제주입도 시조인 진계백(秦季伯)이 제주에 들어와 거주하고 있었다. 진계백은 큰섬지물이 있는 주진(住秦)가름이라 불리는 곳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진씨 입도조인 진계백은 고려 공민왕 때 탐라에 들어온 유이민으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 시절 찬성사를 지낸 진계백은 권신 간에 알력이 심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1372년경 가속과 노비 등을 거느리고 애월포로 들어왔다. 진계백이 제주에 들어온 배경에는 혹 입을지도 모를 가문의 멸문지화를 피하고자 함이 있는 듯하다.

진계백이 입도한 2년 후인 1374년에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하러 제주에 온 최영장군은 진계백이 제주에서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목호의 난을 평정하고 환도할 때 진계백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다는 기록이 증거다. 그러나 고려 조정의 혼란과 불의를 내다 본듯한 진계백은 최영 장군과의 동행을 거부했다.

광명정에 있는 진계백의 묘.
광명정에 있는 진계백의 묘.

과오름 동쪽 애월리 지경인 광명정에 진계백의 묘지가 있다. 진계백의 묘는 본래 고려의 분묘 형태인 방묘였다. 일제때 도굴이 되어 원형이 손상되었다 한다.

목호의 난과 최영 장군

제주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의 현장인 새별오름은, 가파른 높이만큼이나 처연한 역사를 안고 오늘도 등산객들을 품고 있다.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목호의 난은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공민왕(1352-1374)의 반원정책으로 제주섬은 목호세력과 고려가 수차례 부딪치는 싸움의 현장이었다. 특히 명나라와 관련하여 1374년에 치룬 거대한 전쟁으로 목호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제주는 고려에 다시 귀속되었다.

신흥국인 명나라는 고려에 제주의 양마 2000필을 요구했다. 고려관리가 제주에서 말을 취하려 하자, 탐라목장을 관할하던 목호는 300필만 내주었다. 명나라가 2000필을 재차 요구하자, 공민왕은 제주정벌을 위한 출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정예군 2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장군이었다.

기병 3000여 명과 많은 보병을 거느린 목호군에는 당시 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결혼한 제주 여자 사이에 태어난 반() 몽골족화 된 제주민과 고려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은 제주 선인들이 가세해 있었다.

전투 초기에는 목호군이 명월포 등지로 상륙하는 출정군을 무찌르며 기세를 올렸으나, 이후 목호군이 명월촌에서 새별오름 등지로 밀리면서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검은데기오름(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한 달여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인 관음보와 석질리 등이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대피하자 최영 장군은 배 50여 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고려 출정군은 도망가는 목호들을 쫓아가 전부 살해하였다. 목호의 난 이후 탐라선인들은 고려관리의 수탈과 행패로 여전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라고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3개월의 치열한 전투 후에 목호에 의한 반란은 진압되었다.

목호의 난은 제주 사회의 공동체를 와해시킨 사건이자, 제주 선인들에게 큰 희생을 초래한 수난의 역사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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