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학문 장려·군사 시설 정비…목민관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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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4·3 당시 수석민정관
모경관, 조선 후기 제주판관 재임
모달겸, 송덕비 세워진 청백 관리
모리 다메조, 제주 생물 연구가
목인걸, 목호의 난 평정한 무관
목인배, 계성사 창건 제주목사
1920년대 제주향교 문묘와 동무, 서무 모습. 사진 중앙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성전이고 대성전 뒤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계성사다. 제주목사 목인배는 1854년 가을 계성사를 창건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20년대 제주향교 문묘와 동무, 서무 모습. 사진 중앙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성전이고 대성전 뒤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계성사다. 제주목사 목인배는 1854년 가을 계성사를 창건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맨스필드1912~?, ‘맨스필드’(Mansfild, Johns.S)는 제주도군정청 제3대 수석민정관, 미국 육군대령. 19464월 제2대 조선경비대 총참모장으로 재임한 바 있다.

전임 수석민정관 베로스(Barros) 중령이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맨스필드(Mansfild) 중령(얼마 후 대령으로 진급)1947123일 정식 취임하였다.

맨스필드는 취임 일성으로 본관은 앞으로 미국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 달성을 위한 일관된 시책과 베로스 중령의 업적을 계승하여 본관의 책임을 완수해 나갈 생각이다. 본도는 자원이 풍부하므로 시책을 산업개발에 치중함으로써 도민과 손을 잡고 민생문제 해결에 기여하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3사건이 일어나자 김익렬은 맨스필드 대령과 제9연대 군사고문 드루스 대위와 함께 세 사람이 모여 전투준비를 수립하고 매일 3인은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한편 맨스필드 대령이 지시에 의해 김익렬은 김달삼(金達三)과 평화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 일이 서울의 딘(Dean, William F.) 군정장관을 비롯해 미군정 수뇌부와 사전 조율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48년 5월 5일, 제주 4·3 처리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딘 군정장관(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맨스필드 대령(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김익렬 9연대장(맨 오른쪽) 등의 모습.
1948년 5월 5일, 제주 4·3 처리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딘 군정장관(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맨스필드 대령(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김익렬 9연대장(맨 오른쪽) 등의 모습.

194855일 제주도에 비래(飛來)한 딘 군정장관은 동행한 안재홍(安在鴻) 민정장관, 조선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宋虎聲) 준장,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 유해진(柳海辰) 제주도지사, 제주도군정청 수석민정관 맨스필드 대령, 김익렬 제9연대장, 최천(崔天) 제주도경찰감찰청장 등이 제주도군정청 회의실(제주중학교)에서 제주도사태 해결을 위한 수뇌회담을 개최하였다.

김익렬(金益烈) 연대장과 김달삼(金達三)의 만나 추진한 평화회담은 결렬되어 그 후 복잡하게 굴절된 사태로 치닫더니 194856일 김익렬이 해임되고 동년 7월 맨스필드도 이어 해임되었다.

모경관牟景觀1709(숙종35)~?, 문신. 제주판관. 전라도 함평에서 출생, 자는 무숙(茂叔)이며 본관은 함평이고 정경正耕의 아들이다.

1750(영조26)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57(영조33) 4, 안세윤(安世潤)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598월에 떠났다.

판관으로 재임 중인 17576월 제주 백성 40여 명이 산능역(山陵役)에 자원하여 올라갔다. 임금이 제주 사노(寺奴) 유만길(兪萬吉김원행(金遠行)1720(숙종46) 인산(因山)에 부역한 바 있었는데 부역 차 왔으니 가상히 여겨 그 자손에게 천역(賤役)을 면제하게 하였다.

175710월 홍양한(洪良漢)을 제주 독운어사(督運御史)로 임명,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년 능역에서 성의를 볼 수 있었으니, 제주에 가는 운곡運穀을 독려하고 나리포(羅里舖)의 일을 감찰하고 귀경하라고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제주의 조방장(助防將) 9명에게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로 나누어 교지를 지급했다.

모달겸牟達兼1749(영조25)~1821(순조21), 문신. 대정현감. 예조좌랑, 본관은 함평이고 출생지도 전라도 함평이다.

자는 선보(善甫), 호는 중심당(中心堂) 또는 두암(蠹庵)이다. 아버지는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한 경관(景觀)이며, 어머니는 현풍곽씨(玄風郭氏)이다.

1789(정조13)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814(순조14) 9, 백사건(白師建)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하고 18176월에 떠났다.

당시의 지방 수령으로서 제주목사는 허명(許溟), 윤구동(尹久東) 등이 재임하였다.

현감 모달겸은 1814년 대정성 북성 안에 있는 객사인 영안관(瀛安館)에 패감실(牌龕室)을 세웠다. 1814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의 좌통례·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면서 청백한 관리생활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모리-다메조1884~1960, 일본의 생물학자. 제주도의 식물 채집 및 생물 연구가.

1904년 일본의 도쿄제국대학 이과대학의 제일임시교원양성소 박물과를 졸업, 19118월 경성(京城)제일고보의 교사로서 당시 이왕가(李王家)박물관에 근무하는 일본인 하군산성(下郡山城)과 함께 제주도로 들어와 식물 500여 종을 채집하여 식물학자 나카이(中井猛之進)에게 감정을 의뢰, 그중 23종이 신종(新種)임을 확인하여 발표한 바 있다. 19231월 그는 제주도와 대마도(對馬島)의 동물 분포상을 고찰하여 그 시대의 상태를 추론하였다.

이듬해 제주도육산(陸産)동물개론이란 글을 발표, 무척추동물 6종을 소개하고 1928년 제주도의 양서류(兩棲類) 생물 7종을 발표하고 제주의 파충류에 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같은해 7월 제주에서 전국의 생물 담당 교사에 대한 하계강좌(夏季講座)가 열리자 그는 이시도야 쓰도무(石戶谷勉)와 함께 동호인을 인솔하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식물조사를 실시하였다. 같은해 제주도 식물의 수직분포론이란 글을 문교의 조선’ 10월호에 발표하였다.

목인길睦仁吉?~1380(우왕6), 고려 공민왕 때의 무관. 대호군, 제주 목호난을 평정한 무장. 본관은 사천.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할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하여 11년간이나 원나라에 있었던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신임을 받아 계속 승진 병부상서가 되었다.

1374년 제주토벌을 위한 전라도상원수(全羅道上元帥)로 발탁되었다.

1854년(철종 5) 목인배睦仁培 제주목사가 건립한 제주향교의 계성사(啓聖祠). 진사 김용징金龍徵의 글씨.
1854년(철종 5) 목인배睦仁培 제주목사가 건립한 제주향교의 계성사(啓聖祠). 진사 김용징金龍徵의 글씨.

목인배睦仁培1794(정조18)~?, 문신. 제주목사. 대사간, 자는 치익(稚益), 호는 가은(嘉隱)이며 본관은 사천, 목안중(睦安中)의 아들이다. 1853(철종4) 12월에 백희수(白希洙)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558월에 떠났다.

1853년 주성 남문 밖 삼성사 서쪽에 있는 사직단을 개축하였다. 1854년 가을에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고 정헌(靜軒) 김용징(납읍 출신)이 제액(題額)하였다. 목사 목인배가 지은 계성사 상량문’(上樑文)이 전해지고 있다.

처음 대신(臺臣) 김영업(金英業, 거로촌 출신), 신상흠(愼尙欽, 조천 출신) 등이 전후로 상소하여 계성사 건립을 서둘렀는데 이 해에 유생 고사징(高泗澄)이 또한 상소함에 영상 김좌근(金佐根)에게 다시 아뢰어 윤허를 받아들이어 본주의 향교 안에 건립하였다.

계성사를 창건하고 1854108일 먼저 대성전에 고유제를 거행, 5위의 위판은 동 9일 낮 계성사에 봉안하여 봉안제를 시행하였다.

또 목사 목인배는 별시를 개설, 이때의 영상 김좌근이 제()를 주어 본도로 파견, 과장을 열어 문과에 김명악(金命岳, 납읍 출신), 오승현(吳承鉉, 정의 출신), 박수룡(朴秀龍, 곽지 출신) 3명을, 또 무과에 이언길(李彦吉·일명 友植, 옹포 출신) 9명을 급제시켰다.

동년 1월부터 3월까지 명월진의 군기를 보수하였다. 또 동년 8월에 관사의 보수를 하기 위해 전 만호 신성흠(愼性欽, 조천)을 임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18571, 명월진 만호 김명임(金命任, 조천)이 신병으로 사직서를 내니 별방진과 애월진의 조방장 및 출신 중에서 3(三望)을 갖추어 보고하였다. 목인배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방선문(訪仙門) 바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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