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과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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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조, 제주숲치유연구센터대표·산림치유지도사/논설위원

어릴 적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였다. 아프면 대부분 민간요법으로 다스렸다. 저의 어머니도 그럴 때가 많았다. 배가 아프면 가끔 뜨거운 돌을 이용했다. 집 주변 울타리에 있는 넓적한 돌을 주워왔다. 부엌 아궁이에서 땔감으로 밥을 짓고 난 후 잉걸불에 돌을 묻었다. 돌이 뜨거워지면 그 돌을 꺼내 수건이나 옷조각으로 감싸 방으로 가져왔다. 아랫목에 몸을 눕히고 아픈 배 위에 뜨거운 돌을 올려놓고 있으면 아픔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처럼 제주의 현무암은 민간요법이나 생활 용구에서부터 온 섬을 두른 돌담에 이르기까지 제주 사람들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벗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화산활동으로 뿌려놓은 것이 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 없는 곳이 없다. 들판에도, 오름에도, 밭에도, 해안에도, 집 울타리에도, 심지어 무덤이나 땅속에도 돌이 있다.

그렇게 지천에 널려 있어도 똑같은 돌 하나 없다. 큰 바위가 있는가 하면 모래알처럼 작은 돌도 있다. 뾰족하고 길쭉하고 둥글고 구멍이 숭숭 나 있기도 하다. 생김새 그 자체로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기에 제주 사람들은 돌처럼 무던한지도 모른다. 돌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희망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돌담이다. 거대한 자연 위에 돌담을 그렸다. 거무스레하며 못생긴 현무암으로 제주를 두르고 묶었다. 해안을 묶었고 밭을 묶었고 목장지대를 묶었다. 마을을 묶었고 집을 묶었고 무덤을 묶었다. 풍토적 곡선 지형과 잘 어울리도록 묶었다. 그리고 현무암 행렬로 거듭났다.

밭을 보면 그렇다. 밭에는 밭담을 그렸다. 꼬불꼬불 꼬리를 물고 그물망처럼 끝없이 이어놓았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곡선의 파노라마이다. 살아있는 듯 구불거린다. 제주 모습과 지나치게 닮았다.

중산간 목장지대는 어떤가. 그곳에는 잣성을 담았다. 멋대로 생긴 돌들을 한 줄로 세워놓았다. 굽이쳐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넓은 들판을 가로질렀다. 때로는 나무숲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지난 온 긴 역사의 고된 흔적을 말하는 듯하다.

해안에도 있다. 촘촘하고 겹겹이 쌓은 진성이다. 주변 섬과 연결되는 해안 곳곳을 둘렀다. 군사방어 목적이다 보니 높고 견고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있다. 이외에도 마을이나 집 울타리, 올레에도 돌담을 둘렀다. 긴 올레에는 울담이 도열하고 초가 벽은 축담이 지켰다. 심지어 바닷고기를 잡기 위해 돌그물 원담을 쳤다. 무덤을 두른 산담도 있다.

이렇듯 돌담은 제주 사람들이 500년 넘게 만들어놓은 조형물이다. 아버지는 해머로 돌을 깨어 나르고 쌓고 어머니는 자갈을 주워 골채에 담아 나르고 또 날랐다. 그렇게 피와 땀으로 쌓고 쌓으며 이어온 돌담의 총 길이가 무려 3만6,355㎞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에 밭담만 2만2,108㎞에 이른다. 그래서 돌담을 ‘흑룡만리’라고 부른다. 돌이 많은 섬에서 돌과 벗 삼으며 살아온 결과물이다. 공동체의 대역사이다. 세계에도 없는 유일한 창조물이며 걸작품이다.

그런 돌담이 이제 우리에게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제주의 자연경관에다 돌담이라는 인공적 경관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경관을 보노라면 닫혔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진다. 시원한 공간이 마음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돌담에 꽂혀 집중력이 살아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돌담의 경관치유에 조용히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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