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건물 사라져도 옛 도심의 얼굴 간직한 산지천
애틋한 어린 시절 기억 떠올려
산지천과 남양여인숙
콩나물시루처럼 꽉 들어찬 만원 버스도 안내양의 출발 소리 없이는 떠날 수 없던 시절. 거친 붓질로 그려낸 남루한 영화간판에도 가슴이 뛰고 웃돈을 얹어서라도 영화표를 손에 쥐었던 시절. 양복점 재단사의 가위질 소리와 골목 밤을 수놓던 어머니의 그리운 재봉질 소음까지.
떠올려보면 눈 시린 아련한 풍경들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게 세월이라고. 누군가는 사라지고 어떤 곳은 변해가며 세월은 빠르게 달려왔습니다. 그 흑백사진 같은 시절이 물밀듯 밀려옵니다. 지금 바람난장은 제주 원도심의 상징, 산지천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이 안에는 동네 터줏대감격인 오래된 포목점들과 동문시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뱃사람들의 하루를 열어온 산지포구도 역사를 같이 합니다. 일부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사라졌으나 산지천 일대는 옛 도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바람난장. 오늘은 작정하고 지난 시절을 소환하려나 봅니다. 시낭송가 김정희님이 나기철 시인의 ‘남양여인숙’을 들고 나왔습니다.
동부두 가는 길목
문무병의 남양 여인숙
아직 그대로 있다
그 옆 희망 여인숙과 함께
그이 군대 가기 전
세계 문학 전집 읽고
당시(唐詩) 필사하던 뒷방
부두에 여객선 들어올 때
손님 붙들던 앞길
일본으로 시집 갔다는
그 누이 계순이
만들어 주던 비빔 국수
한번 불탄 적도 있던 집
만년 야당 부위원장 하던
그 아비 얼마 전
가 버리고
IMF 온 오늘까지
남양의 불빛처럼
남양 여인숙
오늘도 어둠 속
단단히 서 있다
나기철 ‘남양여인숙’전문
산지천 물길 끝자락, 동부두 가는 길목에 오롯이 서 있던 남양여인숙. 누군가는 사랑을 흠모하고 누군가는 밤새 술잔을 채우며 우정을 다지던 곳입니다. 시인에겐 ‘군대 가기 전 / 세계 문학 전집 읽고 / 당시(唐詩) 필사하던 뒷방’이라는 이름의 아지트였나 보네요.
‘부두에 여객선 들어올 때 / 손님 붙들던 앞길’로 묘사된 그 길 언저리. 아마도 핑크빛 형광 조명이 불 밝히던 산지천 일대를 말하나 봅니다. 밤새 잠들지 못해 흥청거리다가 새벽이 돼서야 물 흐르는 소리만 나직이 흘렀을, 그 감춰진 곳. 그러나 지나고 나면 다 눈물겨운 시절입니다. 산지천에 기대어 살던 누추했던 그들의 삶도, 남양여인숙에서 보낸 반짝거리던 청년들의 낭만도...
시에 등장하는 문무병 선생은 시인이면서 제주의 무속연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한 시대를 풍미하던 로맨티스트였다고 하죠. 선생이 학창시절 살던 집이 다름 아닌 남양여인숙이라니, 동시대를 살던 이들의 가슴 속에 이 시는 그 자체로 짙은 향수입니다.
사라져 가는 것이 애틋한 건 낡은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지나온 과거는 바래고 흐릿해서 더 빛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 한 구석 자리 잡고 있는 추억 한 편을 불러내고 싶을 즈음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성악가 윤경희님이 패티김의 ‘이별’을, 이어서 황경수님과 함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띄웁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산지천의 가을은 또 무던히도 변해갈 이 도시의 희로애락을 끌어안고 저물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리움의 계절이 또 지나갑니다.
사회 - 정민자
그림 - 홍진숙
시낭송 - 김정희와 시놀이 (이혜정 장순자)
소금 - 전병규
반주 - 현희순
성악 - 황경수, 윤경희
플롯 - 이관홍
사진 - 허영숙
영상 - 김성수
글 -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