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일제 침탈에 분노 항일 활동…애국지사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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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제, 탐라 왕자·반란 진압
문국주, 4·3 사건 관련 저술
문근, 추자도 침략 왜구 격퇴
문남규, 항일 운동 옥고 치러
문남은, 제주 지역 항일 운동
문달현, 20여 년 의료업 종사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인 법정사 터의 건물지 모습.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기단석, 주춧돌, 돌담 등이 남아 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인 법정사 터의 건물지 모습.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기단석, 주춧돌, 돌담 등이 남아 있다.

문공제文公濟생몰년 미상, 고려 충숙왕 때 탐라의 왕자.

문창우(文昌祐)의 아들. 1300(충렬왕26)에 왕자직을 세습하였다.

1318(충숙왕5) 3,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엄복(嚴卜) 등이 공모하여 탐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자 문공제가 괴수 2명을 죽이자 난은 진압 평정되었다.

같은 해 5, 고려 조정에서는 제주존무사(濟州存撫使) 배정지(裵廷芝)를 파견하여 탐라백성을 위무하였다.

문국주文國柱1919(일제강점기)~1996, 저술가(著述家). 재일교포, 본명은 문옥주(文玉柱)이며 필명은 문국주로 썼다. 본관 남평, 제주시 도두 도도릿개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전수(專修)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해방이 되자 귀향하였다.

일제 시에 학병 출신들과 대학을 나온 신진 인텔리들과 함께 로고스(logos)회를 조직하여 제주제일중학원을 개설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들 멤버들은 재력가 황순하(黃舜河)를 설득하고 100만 원을 희사받고 19463월에 중학교 인가를 받았다.

동년 10월에 오현단 앞 제주농업학교 구지(舊址)를 임대받아 오현중학교를 개설하여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84·3 사건이 일어나자 투옥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태백산맥을 넘어 북쪽에서 활동하던 중 북한의 정책에 염증을 느껴 중국으로 탈출한 드라마틱한 체험으로 생애를 마쳤다.

잡지 코리아 연구’ 10호에 제주도 4·3 사건은 무엇인가?’라는 특집 좌담회에서 그는 좌익 모험주의자의 폐해를 지적하고 민족 화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사회주의운동사사전조선파벌투쟁사가 있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서 40년이 되는 1988년 도쿄(東京)에서 제주도 4·3 사건 40주년 추도기념 강연회를 개최, 아사히(朝日)신문 등에 보도되어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강연 내용을 주로 하고 거기에 약간의 새로운 자료를 보태어 제주도 4·3 사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간행물이 발간했다.

이는 재일 제주출신 교포 문국주·김석범(金石範김민주(金民柱현광수(玄光洙) 등이 4·3을 알기 쉽게 엮은 해설서이다.

문근文謹생몰 미상. 무신, 왜구(倭寇) 나포 공로, 절충장군 문충덕(文忠德)의 아들이다.

벼슬은 충무위(忠武衛) 부사직(副司直)을 지내었는데 1433(세종 15) 8월에 진무(鎭撫) 박원의(朴元毅)가 침입한 왜구를 주자도(舟子島, 추자) 남방 해상에서 잡고, 이들을 각 관에 나누어 가두었다.

문근이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진언하기를 왜구는 병진년(우왕 2, 1376)부터 을미년(태종 15, 1415)까지 틈을 타서 돌입하여 살인과 약탈을 하였으니 우리에게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입니다. 만일 이들을 살려 보내면 우리 고을의 호구와 도로, (), () 등을 알아서 재입구(再入寇)할 것이니 이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대징(大徵)하여 백성들이 바라는 바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이에 김연(金煙) 목사가 아뢰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남규文南奎1870(고종7)~1932(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활동. 본관은 남평, 문평송(文平松)의 차남으로 안덕면 감산리 -세미에서 출생.

법정사 항일운동에 가담한 문남은(文南恩)은 바로 문남규의 아우이다.

이들 형제는 모두 중문면 도순리 돌숭이의 법정사에 드나들며 종사하면서 일제의 침탈에 분노하였다.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남은文南恩1875(고종12)~1953,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본관은 남평, 문평송의 3남으로 중문면 강정리 가래-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은 안덕면 감산리 -세미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문남규(文南圭)는 그의 친형이 된다.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달현文達賢1903(광무7)~1973, 초등 교사. 의사.

대정읍 상모리 모실-서상동에서 아버지 문화일(文化日)과 어머니 양의규(梁義奎) 사이에서 태어나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를 졸업(1926)하고 한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임(1926~1929)하였다.

의사가 되기 위해 평양으로 건너가 기성(箕城)의학강습소를 마치고(1932) 동년 7월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모슬포에서 개업했으나 더욱 전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만주(滿洲)로 건너가 1943년 만주국립대학 용정(龍井)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만주국 사평성(四平省) 개원현(開原縣)에 개업한 영성병원장으로 취임, 또 개원현 공의(公醫)를 겸임하였다.

다시 봉천성 천령현(鐵嶺縣) 공의까지 겸임하던 중 조국이 해방되자 귀국하였다.

1946년 미() 군정청으로부터 의사면허 취득, 충남 대전시에서 개업하여 20여 년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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