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억새
  • 제주일보
  • 승인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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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문 수필가

 

억새가 슬피 울면 가을이다. 가을은 억새와 함께 온다. 특히 제주에서는 억새가 하나둘 피기 시작하면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으을인가아아요

그 노랫소리가 더 구슬프게 들려오는 건 가을에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 때문이 아닌가.

여름내 무성하던 억새들이 천천히 마르기 시작한다. 줄기가 마르면 잎들도 말라 억새는 누렇게 변색이 되고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자꾸 가벼워지고 말라가는 것일까. 억새의 일생은 어쩌면 인간의 일생과 그렇게 많이 닮았을까.

억새는 방어능력이 없다. 그래서일까. 봄부터 연한 잎을 단단하고 억세게 하여 사람들이 베거나 만지려 들면 날카로운 잎으로 살갗을 베기도 한다. 수북하게 뭉쳐 자라면서 보호를 위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밟히면 최후의 저항을 하는 막다른 골목의 쥐처럼 미약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발휘한다.

억새는 군락을 이루며 자라기를 좋아한다. 들판과 오름에 홀로 있기보다 함께 있기를 즐겨한다. 서로 손을 잡고 팔을 뻗으며 어깨를 함께하고 자라는 것을 행복해한다. 같이 서서 바람이 오면 함께 일렁이며 노래를 부르고 같이 춤을 춘다. 독창보다 합창을 좋아하고, 혼자 나서기보다 함께 즐기면서 살고 싶어 한다.

억새는 유난히 오름을 좋아한다. 평평한 평지보다 굴곡이 있고 바람이 좋아하는 오름에 자리 잡기를 좋아한다.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기를 희망한다. 바람이 오는 것을 잘 알아차릴 만한 높이로만 자라기를 즐겨한다. 오름에 서서 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을 행복해한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 가운데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확실한 게 어디 있는가. 비록 혼자 걷지는 못하지만, 수시로 다가와서 등을 토닥여주고 몸을 흔들어주며 흥을 돋워주는 바람. 그 친구가 있어서 삶의 의미를 두껍게 해준다.

비록 발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바람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어 세상 소식을 너무나 잘 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람은 세상 곳곳을 다니며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와서 속삭여준다. 도시를 지나면서 흉흉하고 가슴 떨리는 사건들도 전해준다. 넓고 광활한 바다를 지나오면서 싱싱한 지느러미의 투명한 물방울 이야기도 자주 알려준다. 그래서 발이 없어도 억새는 모든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새별오름의 억새는 가을과 겨울 동안 찾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봄이 오기 전, 제 몸을 태워 환히 불을 밝히며 다가오는 새해의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산 전체 억새들이 온몸을 불태워 소원을 빌고 무병장수를 비는 손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는 다시 새싹이 돋을 거름을 남기면서 새 생명의 불씨를 갈무리한다.

함께라는 것을 억새는 몸으로 말해주고, 그렇게 태어나서 자라고, 그리고 함께 몸을 불사르며 떠나갔다. 그 불꽃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환희와 흥분과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다시 새 봄을 기다리는 대지의 기대와 나무들과 그 뿌리들, 가지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알려주는 듯 했다.

천천히 억새 오름을 걷다보면, 억새가 전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느리게 걸으며 억새들이 일렁이면서 일러주는 말들을 들어보는 것. 이 가을에 하기 좋은 일이다.

붉은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가을 저녁, 아직 어둡기 전의 오름을 올라본다. 구름 사이로 지는 태양이 더 없이 붉게 빛을 내리고 있다. 그 빛은 오름의 억새들에게 골고루 뿌려져 온 오름이 환상적인 음률로 뒤덮힌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억새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다. 굳고 딱딱한 오름의 등이 풀어지면서 하루의 고단한 빛이 천천히 어둠속으로 걸어간다. 억새들이 눈을 감기 시작하자 오름의 오솔길도 어둠속으로 잠겨간다.

고단한 삶의 길들이 천천히 억새속으로 잠겨가며 새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름에 환한 달빛이 내리고, 억새 사이로 달빛 길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상의 길은 바다처럼 물결치면서 자꾸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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