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배, 혁우 동맹·사회 운동
문두철, 무극대도교 항일 활동
문명구, 조선 후기 정의현감
문방귀, 조선 초 효자로 명성
▲문덕홍文德洪:1902(광무6)~1949, 대한민국 임정과 광복군의 항일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主席) 김구(金九)의 경호대장. 광복군 대원. 본관은 남평, 문보룡(文寶龍)의 장남으로 산북 한림읍 옹포리 ‘독-개’에서 태어났다.
일본 선박의 선원으로 강제 징용되어 상하이·홍콩 등지에서 근무하던 중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할 각오를 하고 1940년 탈출하는 데 성공,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0년 9월 중국의 광서성(廣西省) 유림(柳林)·계림(桂林) 전투에 참가, 1941년 2월 개봉(開封)에 침투하여 지하 공작을 수행하고, 1942년 10월 중경에서 임시 정부 경비 대원에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의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 독립당에 입당한 후 1944년 임시 정부 재무부 총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동년 6월 서무국 직원을 겸직하였다.
1945년 임시 정부 주석 경호실장으로 승진, 또 1945년 봄에 상해 임시 정부에서는 광복군이 국내 침투 계획을 세우고 미군 OSS에 의뢰하여 비밀 공작원을 양성할 때 공작원으로 훈련을 받고 다른 요원들과 함께 국내에 침투, 적의 군사 시설과 적의 동향을 조사 탐지하여 임정에 보고하였다. 이때에 임정 주석 김구와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김구 주석은 그 사진에 친필로 ‘임별’(臨別)이란 제하에 ‘문덕홍 동지는 부양(阜陽) 공작을 담당 출발 시 기념으로 찍은 사진, 민국 27년 5월 9일 중경(重慶)에서’라고 써서 주었다. 그것은 결사대로 보낼 징표였다. 이는 김구 주석이 마치 윤봉길(尹奉吉)과 이봉창(李奉昌)이 석별 시의 기념사진을 찍은 것과 같은 본보기였다.
1945년 5월 비밀 공작원으로 국내에 특파되어 동년 8월 초에 일제 당국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중 며칠 지나 조국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중국에서 입은 전상 후유증과 고문의 여독으로 1949년 5월 12일 순국, 우연히도 동년 6월 24일 김구 주석이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란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의 1개월 전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문지사가 부산시 영선동에서 사망하자 제주로 운구, 한림읍 동명리 선영(先塋) 아래 안장되고, 순국한지 46년만인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기해서 고인의 묘역에 제주도 재향군인회에서 ‘문덕홍 지사 독립 항쟁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문도배文道培:1908(융희2)~1953(분단시대),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입법의원, 본관은 남평, 문기주(文璣周)의 3남으로 산북 구좌면 세화리 ‘는-곶’에서 태어났다.
192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1930년 3월에 구좌면 일대에서 결성된 혁우동맹이 강력한 항일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 혁우동맹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申才弘)이 주도하였다.
동년 11월 초순 맹원(盟員) 신재홍, 문도배, 강관순, 김순종, 김시곤 등이 모여 맹원 부모(夫某)의 행동으로 혁우동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1931년 1월 하순 혁우동맹의 해체를 논의하였다.
강창보(姜昌輔)가 감옥에서 나오자 동년 4월 신재홍, 오대진 등이 문도배의 집에 모여서 혁우동맹을 정식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동 5월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새로 조직하고, 동 구좌 지역 담당자 신재홍은 동년 7월 오문규, 문도배와 모여서 이들을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신재홍은 연평(牛島), 문도배는 세화, 오문규는 하도리 출신으로 그 지역의 해녀와 농민을 조직화하였다.
또한 혁우동맹원 신재홍, 문도배, 강관순, 김순종, 김시곤 등은 1930년 11월 초순에 모여서 향후 사회 운동의 방법에 대한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 1931년 후반부터 관제 해녀 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때라 청년 운동가들은 야학(夜學)을 통하여 부녀자들을 지도하더니 1932년 1월 해녀 항일투쟁이 폭발했다.
그는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건준 구좌면위원장으로, 이어 구좌면인민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문두철文斗哲:1888(고종25)~1947(미군정기),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 본관 남평, 문기학(文起學)의 아들로 산북 노형리 ‘름’에서 태어나 처음 보천교를, 다음은 미륵교(彌勒敎)·대세교(大世敎) 등 민족종교를 믿었다.
1937년 1월경 김경식(金景軾, 71·영평)의 권유로 무극대도교를 믿게 되어 핵심 신도로서 포교에 활약하였다.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문명구文命龜:1722(경종2)~?, 문신. 정의현감. 은산(殷山)현감, 함경도 길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원(汝元), 본관은 개녕(開寧), 문시주(文是周)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26)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 비인(庇仁)·은산(殷山)현감에 제수되고 관직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1769년(영조45) 9월, 유집(柳潗)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71년 6월 좌천되어 떠났다.
▲문방귀文邦貴:생몰년 미상, 효자, 관리. 현감, 우도지관 문충세(文忠世)의 아들이고 방보(邦寶)의 동생이다. 제주 태생으로 16세 때에 서울에 올라와 조부의 업을 계승하려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글을 배워 충효의 길을 다하고자 하였다.
영곡 고득종(高得宗)의 매부로서 직장(直長)·금구현령(金溝縣令, 전라도)·예빈시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405년 처음으로 직장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갑자기 부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쳤다.
벼슬이 만기가 될 무렵 또 모상을 당해 3년 종제를 하니 1413년(태종13) 6월 제주목사 윤임(尹臨)이 제주의 직장 문방귀·제공(提控) 양심(梁深)·생원 고득종 등과 함께 효자로 조정에 보고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1425년 10월 임금을 배알하고 동 12월 4일 특진으로 예빈시(禮賓寺) 판관으로 제수되었다. 탐오(貪汚)한 일이 있었는데 고득종이 힘써 비호(庇護)한 관계로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조정의 허가를 받아 1426년 제주에 있는 처자를 상경케 해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