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어진 ‘영봉’…그 속에 품은 아픈 사연
아름답고 어진 ‘영봉’…그 속에 품은 아픈 사연
  • 제주일보
  • 승인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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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수산봉과 수산리의 역사적 사건
조선 시대 수산봉 봉수대 설치
위치에 대한 기록·유적은 없어
강응현·박일호 등 수산리 출신
제주지역의 역모 사건에 연루
수산봉(수산망)의 모습. 수산봉 정상에는 조선 시대의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수가 있는 곳이란 의미에서 수산봉(烽) 또는 수산망(望)이라 추정된다.
수산봉(수산망)의 모습. 수산봉 정상에는 조선 시대의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수가 있는 곳이란 의미에서 수산봉(烽) 또는 수산망(望)이라 추정된다.

물메오름(121m)으로 부르기도 하는 수산봉 정상에는 조선 시대의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수가 있는 곳이란 의미에서 수산봉() 또는 수산망()이라 기록되고 있다.

제주의 역사문화 품은 물메오름 수산봉

망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망지기를 두어 망보던 곳이다. 봉수대는 일반적으로 산이나 오름 정상 부근에, 연대는 해안선 높은 지역에 설치됐는데, 밤에는 햇불로 낮에는 연기로 통신했다.

제주도의 봉수와 연대는 기록상으로 조선 세종 때 비로소 축조됐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시설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불을 피우는 시설을 했고, 대체로 제주 해안을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오름에 설치됐다.

평시에는 한 번, 적선이 나타나면 두 번, 해안에 접근하면 세 번, 상륙 또는 해상 접전하면 네 번, 상륙 접전하면 다섯번 의 봉화를 올렸다. 규모는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척 내외였다.

애월진에 소속된 수산봉수는 동쪽으로는 도두봉수, 서쪽으로는 고내봉수와 교신했다. 별장 6명과 망직이와 망한으로 불리는 봉군 24명이 배치돼 4교대로 24시간 경비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탐라순력도 등 여러 고문헌은 물메오름 수산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고 기록하거나 그리고 있다. 수산봉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은 없어 보인다.

오름이 아름답고 어질다 하여 오래전부터 영봉이라 불리는 수산봉 정상에는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다. 제주도 전역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산천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수산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기우제란 가뭄이 끝에 단비를 내려달라고 풍우뇌우신과 산천 성황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동자군(童子軍) 150명이 청의를 입고 기우축사를 합창하며 기우제를 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주도에서는 한라산 산천단, 물메오름 수산단, 풍운뇌우단, 사직단 등지에서 제주목사의 주재로 기우축사를 고하여 제를 행했다 전한다. 수산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에 대한 표지판이나 안내판은 아직은 없다. 당국에서는 수산봉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수산리와 관계된 제주의 역사적 사건들

수산리는 제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루되어 당해야 했던 아픈 사연들도 품고 있다. 그중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과 김지의 난, 그리고 이재수 난에 관련된 사연을 소개한다.

수산봉 중턱에 조성된 강씨 선영. 길운절·소덕유 난에 가담한 문충기의 사위 강응현의 묘가 위치해 있다.
수산봉 중턱에 조성된 강씨 선영. 길운절·소덕유 난에 가담한 문충기의 사위 강응현의 묘가 위치해 있다.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시기 정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이야기가 퍼지고 1589년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의 처사촌인 소덕유는 비밀이 샐 염려가 적은 제주에서 역모를 꿈꿨는데 이렇게 하여 일어난 사건이 이른바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사인 길운절은 미리 제주에 온 소덕유와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 제주에서 만나 납마첨지(納馬僉知) 문충기·훈도 홍경원·교생 김정걸 등 제주 선인들을 가담 시켜 제주에서의 모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1592년과 1597년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정의 행정력이 제주에 잘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민들을 학대하는 성윤문 제주목사가 민심을 잃고 있는 등 상황이 가담자를 회유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겨울인데도 성을 쌓아 도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고, 진상과 부역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다. 역모 가담자들은 목사와 경래관을 죽이고 무기와 전마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한양을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거사 2일 전 반란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길운절은 성윤문 목사에게 변란계획을 몰래 알렸다. 이에 제주목과 조정에서는 주모자 18명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여 능지처참으로 다스렸다. 또한 제주 유림 30여 명이 심문을 받고 그중 6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제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조정에서는 제주안무어사 겸 안핵사로 청음 김상헌(제주오현 중 한 분)을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고, 동요하는 도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제주에서 과장(科場)을 열기도 했다.

길운절·소덕유 난으로 제주의 사회가 요동칠 때 그 여파가 수산리에도 크게 미쳤다 한다. 문충기의 사위인 강응현이 수산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강응현의 묘는 수산봉 중턱에 조성된 강씨 선영에 있다.

수산봉 강씨 선영.
수산봉 강씨 선영.

애월읍 출신 김지가 일으킨 김 진사의 난

1858(철종 9) 진사시에 합격한 김지(金志:1835~1896)는 애월읍 하귀리 출신으로, 당시 삼정(三政)의 문란과 부패가 만연된 실상에 분노하는 이들을 모아 189011월에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이듬해 정의현에서도 이완평과 현계환 등이 민란을 일으키자, 당시 조균하 목사는 18918월 파면되었다.

김지는 동조하는 세력들을 모아 주성에 쳐들어가고, 도민의 민원을 산 관리의 집을 부수고 추방했다. 전도에 만연된 부패에 분연히 반기를 들고 민란을 일으킨 김지가 오히려 관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탄로가 나 난에 참여한 군중은 김지를 붙잡아와 발길질하고, 결국 관군의 발길에 밟혀 김지는 죽었다.

수산리 출신인 박일호의 외숙이 김지였던 인척관계로 김지에 관련된 집과 사람들을 수색하고 조사 심문하느라 수산리 마을은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여야 했다. 이 사건을 경인민란, 김지의 난, 또는 김 진사의 난이라 부른다.

이재수의 난과 수산리

1901년 일어난 이재수의 난(항쟁)도 수산리와 관계가 깊다. 3의사 중 한 사람인 오대현이 장두로 나선 서군이 명월진성에서 교도들에게 잡혀가자, 대정군의 관노인 이재수가 서군의 장두로 나서면서 등소(等訴)운동은 비폭력에서 격렬한 저항으로 치달았다.

강우백이 장두로 나선 동군과 이재수가 장두로 나선 서군이 지금의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한 황사평에서 합류하니 수만의 군대로 불어났다. 이렇게 이루어진 수만의 반란군은 제주성 안에 있는 부녀자 등의 도움으로 무장한 교도들이 지키는 성문을 열고 전세를 장악했다.

그리고 행패를 일삼던 사이비교도 200명 이상을 처형했다. 이재수와 의거병 반란군이 수산봉 기슭을 통과할 때 수산리 사람들은 진창원 경민장이 주동이 되어 식량과 음료수와 담배를 모아 전달하였으며, 또한 식량을 등짐으로 져서 황사평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수산리에서는 강영선 등 장정 20여 명이 의거군에 가담하여 이재수 난에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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