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신비 간직한 영험한 신의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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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당카름과 곰솔 주변 역사 문화
본향당 있어 당카름으로 마을 지명…제주문화 담고 있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곰솔·포제단 등 마을 역사 유적 다수
본향당 신목의 후손목. 당가름 중심가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매우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다 한다. 오래된 팽나무는 태풍에 무너지고 그 후손목(木) 세 그루가 폐허가 된 본향당을 지키고 있다.
본향당 신목의 후손목. 당가름 중심가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매우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다 한다. 오래된 팽나무는 태풍에 무너지고 그 후손목(木) 세 그루가 폐허가 된 본향당을 지키고 있다.

당동(堂洞)으로도 불리는 당카름은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신앙처인 당신을 모셨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 있던 할망당을 서쪽으로 난 길목을 뜻하는 서목당(섯가름당)이라 한다.

본향당이 있어 당카름으로 불린 마을

본향단의 제단이 남아있는 마을 광장은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아 목놓아 부르는 수산리 선인들의 감격적인 만세소리와 1950년대 후반 저수지 속으로 사라지는 마을을 걱정하며 외치는 저항의 외침소리를 듣고 지켜보았던 곳이기도 하다.

당오백 절오백이 상징하듯 제주에는 수많은 할망당이 있으나, 마을과 동네 이름에 당의 의미를 담긴 지명을 남긴 마을은 드물다. 수산리 당카름은 제주문화를 담고 있는 지명이기에 더욱 애정이 가는 동네이고 이름이다.

당가름 중심가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매우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다 한다. 오래된 팽나무는 태풍에 무너지고 그 후손목() 세 그루가 폐허가 된 본향당을 지키고 있다.

제주의 신당 중 민속(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본향당은 수산(성산읍 수산리) 본향당을 비롯하여 송당본향당, 새미하로산당, 와흘본향당, 월평다라쿳당 등 5곳이다. 본향당은 마을의 생산(生産), 물고(物故), 호적(戶籍), 장적(帳籍)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당이다. 이들은 역사성, 의례, 본풀이, 신앙민, 형태 등과 관련해 제주를 대표할 만한 당들이다.

소앵동에 위치한 항다리궤당.
소앵동에 위치한 항다리궤당.

수산리 본향당과 관련된 항다리궤당의 비경

제주 최고라고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신성한 할망당을 찾아가 뵈었다.

애월읍 수산리와 제주역사문화 공유를 위한 협약을 맺은 자리에서 할망당에 관하여 오간 얘기들은 다음과 같다. ‘혼자 가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워 갈 수 없다고, 외국인 민속학자에게 안내했더니 제주에서 이런 할망당은 처음이고 지하로 내려가는 곳에 숨어있어 찾기가 힘들다고,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같이 있다고도 했다.

저절로 호기심이 생겨 찾아간 곳에서 우리는 여태 경험하지 못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그곳은 선계이고 신의 보금자리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수산리 예원동 사람들이 당골로 다니고 있는 이곳은 이웃 마을 상귀리 소앵동에 위치한 항다리궤당이다. 상귀리 본향당이기도 한 이곳은 음험하고 영험한 기운이 사방에서 우러나는 곳처럼 비친다. 당골들이 이곳을 매우 신성시해서인지 매우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곳으로 항다리궤당은 남아야 할 것이다.

숨겨진 할망당 아래로 형성된 소웽이 내라고 불리는 소왕천은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발원하여 상귀리 소웽이를 거쳐 하귀리 가문동 바다로 이어진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곰솔 주변의 경승과 역사문화

수산봉 아래 조성된 인공 저수지 근처에는 수령 500년이 넘어 보이는 곰솔이 1971년부터 제주도 기념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아 오다가 2004년부터는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승격이 되었다. 학처럼 고고하고 위엄있는 소나무에 눈이 내리면 마치 백곰처럼 보인다고 하여 곰솔이라 불린다. 오래전 소나무를 심어 마을 수호목인 곰솔로 자라게 하고 마침내 천연기념물로 탄생시킨 수산리 선인들과 개인과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며 아담하게 조성한 포제단에 대하여 기술한다.

진주강()씨 입도조 강철과 장손 강우회

진주강씨 입도조인 강철은 1480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을 일찍 여윈 강철은 6촌 형인 대사간 강형의 보살핌 속에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504(연산 10) 갑자사화 때 6촌형 강형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복위를 부당하다고 직간한 죄로 그해 10월 참살을 당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참화를 당하고 근친족들에 대한 박해가 여전함을 목격한 강철은 안전한 절해고도 제주도로 낙향하니, 이때가 연산군 집권 마지막 해이자 중종반정 원년인 1506년이다. 나이 20대의 독신으로 제주도에 들어온 강철은 중종반정으로 들어선 새 조정에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제주시 오라동 속칭 도령지에 정착하였다.

경주이씨를 배우자로 맞은 강철은 농경 생활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아들 형제를 두었다. 장남이 어모장군을 지낸 데 이어 장손 강우회 역시 무과에 급제하고 어모장군이 되어 애월읍 수산리에 정착하였다. 애월진 방어사로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왜적을 막는데 공훈을 남기기도 했던 강우회는 이후 수산봉 남쪽 기슭에 정착하였다.

강우회는 집 주변에 여러 나무를 식재했는데 그중 하나인 곰솔(천연기념물 441)이 남아 수산리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곰솔 주변에는 오래된 집터인 구택지의 흔적이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수산봉 자락에 강씨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강우회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제주의 진주강씨는 어도강칩(어강)과 수산강칩(수강) 등으로 나누며, 애월읍 관내에 가장 많은 강()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를 지닌 곳에 저수지가 들어서고 호반 사이로 난 길에는 수많은 시비가 산책로와 이웃하며 시골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수산봉 자락에 숨은 듯 보이는 아담한 기와집으로 조성된 포제단 등이 시비와 호반과 어울리며 품어내는 이곳의 경치는 제주 최고의 경승지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곰솔 주변의 시석(詩石)과 포제단.
곰솔 주변의 시석(詩石)과 포제단.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한 포제단

수산리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2개의 포제단이 위치하고 있다. 수산저수지를 바라보는 물메오름 중턱에 기와로 지붕을 올린 포제단과 본동에서 올라간 예원동의 전망 좋은 동산 북쪽에 위치한 노천 포제단이 그곳이다.

조선시대 제주는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였던 사회였다. 당굿은 오랜 시간 동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 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 축제였다.

음력 정월에는 마을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신과세제, 음력 2월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제, 한여름에는 우마의 번성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제(마불림제), 9월과 10월에는 1년 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만국대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칠성제, 바다 수호신에게 비는 용왕제, 산신제, 풀무고사제 등 다양한 형태의 굿과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 후기 유교 정책이 펼쳐지면서 19세기 전후하여, 유교식 제사인 포제가 남성 중심으로 행해지고, 이때부터 마을제가 여성 중심의 당굿과 남성 중심의 포제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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