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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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작은 상처는 손금의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세포가 자라면서 이전과 똑같은 무늬를 만든다. 말끔한 재생(再生)이다. 애초 무엇으로 그려 넣었을까. 심하게 화상을 입었거나 조직이 크게 파괴됐을 때는 원상회복이 힘들 것이지만, 웬만해선 지워지지 않는 게 손금이다.

손금은 사람마다 다르다. 손가락 끝마디 안쪽에 있는 살갗 무늬, 그게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용처가 있어 그랬을 것이다. 무늬가 다르고 그 모양이 평생 변하지 않으므로 개인의 식별, 범죄 수사의 단서, 인장 대용으로도 사용된다. 손가락 끝부분에 있는 섬세한 곡선 무늬, 손가락의 끝마디 바닥 면에서 땀구멍 부위가 주변보다 올라가 있고, 서로 연결돼 밭고랑 모양의 곡선을 만들고 있다. 정교한 선들이 출렁거리며 일어서고 있어 만든 이의 별난 취향이 돋보인다. 낙서로 무심히 그려 놓은 게 아님이 분명하다.

유전자가 같은 이란성 쌍둥이도 손금이 다르다 한다. 지문 감정이란 말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 결과는 결정적이다. 이런 특정 목적에 사용하는 것만 아니다. 손금은 손바닥을 보고 운수의 길흉(吉凶)을 헤아리니 곧 수상(手相)이다.

손금 보듯 한다는 말이 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생각에 함몰돼 있는지 손금 보듯 한다는 건, 속내를 들여다보듯 낱낱이 헤아린다는 빗댐이다. 이렇게 손금은 일상성을 지닌 말이기도 하다.

나에겐 이 눈금이 회상의 공간으로 특별하게 다가온다.

다섯 살 때쯤일까. 유난히 수염이 희고 길었던 할아버지는 별채의 조그만 방에서 멱서리를 짰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멱서리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할아버지의 두 손이 축축이 물 먹은 산도짚이 드리운 줄 사이를 번갈아 드나들면 멱서리가 길고 깊어졌다. 하나가 완성되면 아래로 내려놓고는 이내 다시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손은 쉬지 않고 멱서리를 짜는 근면한 손이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다. 산도짚을 손질해 방망이로 수없이 두드려 부드럽게 하고는 끊임없이 멱서리 짜던 그 손.

커서 어머니에게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 크고 작은 멱서리를 등짐으로 지고 오일장에 내어 판 돈을 가용하라며 손에 쥐어줬다 한다. 며느리 사랑이 담긴 돈이다. 그렇게 평생 이어졌다는 것이다. 오일장에 다녀온 할아버지는 다시 그 별채의 작은 방에 눌러앉았을 것이다. 그 대목에 이르러 가슴속에서 무엇이 와락 치밀어 오르곤 했다. 밭뙈기 하나에 식구가 매달렸던 가난에 할아버지의 그 돈은 우리 집의 버팀목이었단다. 노인이 오래 앉으면 오금이 저렸을 텐데,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오른다. 빨리 해 달라 재촉하는데도 다듬고 다듬어 끝까지 완성을 고집하던 수필 속의 노인은 장인정신의 귀감이다. 평생을 일관해 그렇게 방망이를 셀 수 없이 다듬었을 것이다.

멱서리 짜던 우리 할아버지와 글 속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생각하는데, 불현듯 ‘손금’이란 단어가 앞으로 내린다. 내가 내게 묻는다.

‘두 노인, 늘그막에 손금이 온전했을까?’ 평생 작은 방에 갇혀 멱서리를 짜던 할아버지와 방망이 깎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붓던 노인, 아마 손금이 다 닳아 그 자리가 밋밋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 발급엔 무인(拇印)이 필수인데, 요즘 같았으면 어찌할 뻔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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