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후학들에게 고고함·청렴함 보여준 참스승
(160)후학들에게 고고함·청렴함 보여준 참스승
  • 제주일보
  • 승인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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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형, 가시초 초대 교장 순직문서봉, 제주판관, 목호난 평정
문세걸, ‘탐라 준걸’ 평가받아
문소조, 조선 세조때 향교 중수
문신보, 공민왕때 탐라의 왕자
문신주, 세화리 신흥사숙 설립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 전경.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문신주는 제주향교 훈장을 지내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 전경.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문신주는 제주향교 훈장을 지내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문상형文尙衡1912~1948. 일명 문자봉(文子奉). 표선면 가시리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에 투신, 194691일 가시초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전념하던 중 1948510선거 당시 가시리 선거관리위원장으로 투표소를 관리하다가 17시경 남로당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가시리장 강팽림(康彭林)과 함께 순직하였다.

교장 문상형 순직비(가마초등학교 터).
교장 문상형 순직비(가마초등학교 터).

선생의 탄신 101주년을 기념하여 2013128일 제주도교육의정회(이사장 김찬흡)에 의해 순직비를 가시교 교정에 세웠다.

문서봉文瑞鳳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제주판관 및 제주 권지목사(濟州權知牧事). 1372(공민왕21) 3월 제주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 목호에 의해 제주목사 이용장(李用藏)과 고려의 군병 300여 명이 살해당하였다.

이때 문서봉이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동년 4월 체찰사(體察使) 우인열(禹仁烈)을 파견, 문서봉을 이용장 후임, 제주권지목사로 삼아 탐라 왕자 문신보(文臣輔)를 도우면서 목호의 난을 평정하였다.

문세걸文世傑1487(세종18)~1521(중종16), 선비. 자는 사호(士豪), 탐라의 왕자(王子) 문창우(文昌祐)의 후예로서 문명(文鳴)의 아들이다. 본시 사람됨이 활달하였다.

1520(중종15) 8월 제주에 유배 온 김정(金淨)에게 사사하였다. 나이 34세에 죽으니 본도에 유배 온 충암(沖菴) 김정(金凈)은 그를 탐라지걸’(耽羅之傑)이라고 평하고 만사(輓詞)를 지어 내위왈모야 탐라지걸야 오지기애정견호(乃謂曰某也 耽羅之傑也 吾之寄哀情見乎, 마침내 지난날의 무엇을 말하려 탐라의 준걸이었다. 내 이를 만나본 슬픈 마음을 붙여나 하나)” 하였다. 충암의 애도시는 심재집’(心齋集)에 기록되어 오늘에 전해진다.

문소조文紹祖생몰년 미상, 문신. 제주의 교수. 1454(단종2)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세조 때에 제주향교의 교수로 재임하였다. 또 향교를 중수함에 이를 책임져 완수하였다.

1465(세조11) 봄에 제주목사 이유의(李由義)가 부임, 문묘에 참배하고 보니 향교 건물이 퇴락한 것을 아프게 여겨 제주판관 이인충(李仁忠)과 의론, 교수관 문소조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니 드디어 영졸(營卒)들은 순번에 따라 일을 하고 공장(工匠)은 기술을 다하여 건물을 일신시켰다.

또 묘무(廟廡재사(齋舍문장(門墻당옥(堂屋변두(籩豆보궤(簠簋, 제기)와 궤안(几案위판(位板부엌·창고·마구·변소··도로 까지 빛나게 새로워졌다. 문 교수의 특단의 배려로 부로와 학생들이 학업을 권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문신보文臣輔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 탐라의 왕자. 일명 문충걸(文忠傑). 1372(공민왕 21) 3월 목호의 난이 일어나 제주목사 이용장(李用藏)을 죽이고 또 고려 군사 300여 명을 살해하였다.

당시 제주판관 문서봉(文瑞鳳)의 도움과 고려 조정에서 파견 온 체찰사(體察使) 우인열(禹仁烈)의 도움에 의해 문신보는 목호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동년 6월 고려 조정에 대한 이러한 답례로서 제주마 50필을 가지고 문신보는 아우 문신필(文臣弼)을 왕경에 파견하였다.

1374(공민왕 23)에 밀직부사 정비(鄭庇)와 판선공(判繕工) 우인열(禹仁烈0을 보내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고, 육로로 조현(朝見)하기를 청하고, 또 방물을 예전대로 하기를 청하였다.

정비가 돌아올 적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조공은 3년에 한 번 방문하되 바닷길로 따라 오라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금 정비(鄭庇)가 가지고 온 예물은 상공(常貢)보다 지나치니 진실로 사대(事大)를 정성으로 하는 예가 아니다. 하물며 우리 조정은 사해(四海)를 한 집으로 삼았는데, 어찌 작은 나라의 공물을 의뢰하겠는가? 지금 바친 물건 가운데 베() 6()만 받고 나머지 물건은 온 사신에게 부쳐 가지고 돌아가게 한다.”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예부주사(禮部主事) 임밀(林密)과 자목대사(孶牧大使) 채빈(蔡斌) 등을 보내어 제주 말을 요구하였는데 본국에서 밀직(密直) 김의(金義)로 하여금 정료위(定遼衛)에 호송하게 하고, 또 장자온(張子溫) 등을 보내어 사은하기 위하여 함께 가게 했는데, 개주참(開州站)에 이르자 채빈이 이르는 곳마다 술주정하여 매양 김의를 죽이려고 하니, 김의가 견디지 못하여 채빈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잡아서 갑사 3백 인과 진헌마 3백 필을 가지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왕이 시해를 당하니, 밀직사 장자온(張子溫)과 전공판서 민백훤(閔伯萱)을 보내어 명나라에 가서 고부告訃하고, 또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게 하였는데 김의의 변고로 감히 도달하지 못하고 도망해 돌아왔다.

또 우왕 때 차현유(車玄有)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탐라 성주(星主) 고보개(高寶開, 일명 고신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민란의 괴수 차현유를 죽이고 1375(우왕1) 11월 민란을 진압하였다.

문신주文新周1872(고종 9)~1946(미군정기), 서당 훈장. 제주향교 훈장. 자 덕보(德甫), 호 화사(花史). 본관 남평 구좌읍 세화리 -에서 문두인(文斗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경(佑卿) 김희정(金羲正, 조천)의 문하에서 3년 수학하고 20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여 1897(광무 1) 지방 유생들을 많이 발탁할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 시작(詩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동학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15년 일본에 이미 가 있던 문하생들의 초청으로 도일(渡日), 3주 동안에 관광은 마다하고 교포를 모아 논어와 시경의 강론에 열중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를 회상하는 문하생 김호규(金浩圭, 세화)선생님은 논어야말로 인생 50이 된 뒤 읽어야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진리도 터득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항상 두루마기와 갓을 써서 대인접물(對人接物)에도 정좌하여 근엄함을 견지,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아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녔다. 제자들이 노자를 마련하여 찾아갔으나 끝내 사절 스승의 길을 지켜 고고함과 청렴함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고 술회하였다.

문신주는 1922년 김공집(金公執), 문두병(文斗柄), 문석주(文錫周), 김상호(金相浩), 김성조(金聲調), 김재경(金在鏡), 문기주(文琪周) 등과 함께 세화리 -의 교육을 진작시키기 위해 신흥사숙을 설립, 같은 해 122일 개숙식을 개최하였다.

말년에는 향교 훈장으로서, 또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으로서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광복이 되고 이듬해 임종에 붓과 벼루를 가져오도록 하여 ‘(病中血淚書 今日謝諸君 明朝期上仙, 병중에서 피눈물로 글을 쓰오, 오늘의 여러 분 감사하네, 밝은 날 아침이면 신선되길 기약하오.)”라는 15자를 쓰고 결구를 맺지 못한 채 죽었다.

문신주의 시시 제목=賞菊 상국(국화 옆에서), 對汝矜壞水共淸너를 쳐다보노라니 가슴 속이 후련하구나!/ 九秋光景一時生가을철 풍치가 한 때에 환하다./ 香凝葉底浮金爛향기는 푸른 잎 노란 꽃에 엉켰고/ 點綴枝頭片玉橫꽃은 가지 끝에 구슬 같이 점철하였다./ 獨立風霜誇晩節국화는 풍상에 서서 늦서리 아랑곳 않네!/ 肯隨桃李蕩春情복숭아꽃 배꽃은 봄날에 화창하게 피지만/ 淵明去後鮮能愛도연명 떠나간 후 너를 사랑하는 사람 적어짐에 따라/ 千載廖廖隱逸名오랜 세월 은일사라는 이름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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