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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수필가·삼성학원 이사장)

시인들의 투시력(透視力)은 월등하다.

그러기에 잘 익은 대추 한 알의 사연도, 이렇게까지 읽어낼 수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장석주, ‘대추 한 알전문(全文)).

시나브로 만추(晩秋)의 감귤원에서, 몇 번이나 낭송해 본다.

탱글탱글하고 샛노란 감귤을 마주한 나의 속마음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시인이 기가 막히게 짚어 냈다. 몰래 나의 심전(心田)에 다녀 간 사람처럼 말이다.

올해는 꼬리를 물고 엄습했던 태풍들과 긴 장마로, 여느 해보다 힘든 시간들을 감내해야 했다. 더운 땀 훔치고 흙먼지 털어 내며 보낸 노동의 나날들로, 노구(老軀)의 삭신이 더욱 쑤셨다. 열매들의 속살에도, 내 고통의 흔적 고스란히 찍혔을 것이다.

그래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다. 힘든 시간 참아내니, 마침내 수확의 시간이다. 일용할 양식인 돈과 바꿀 수 있다는 환금(換金)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 농심(農心)의 바다에서 넘실거린다.

타이벡 감귤, 노지 황금향, 그리고 하우스 재배 레드향과 한라봉, 천혜향.

많지는 않지만, 일 년간 애지중지 키워 온, 품종 물목(物目)이다. 다양한 색깔과 향기, 맛으로 더욱 예쁘고 대견한 자식같은 열매들.

한 해의 결실인 이놈들이 둥지를 떠나는 새들처럼, 이달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비농원을 떠난다.

당연히, 앞으로 두 달 남짓 수확철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가 된다. 마을 안길들에 인적 끊어지고, 부엌의 부지깽이들도 나서서 일손을 돕는다.

설상가상으로,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국이 막히고, 해마다 전국에서 몰려왔던 인력들도 발길을 망설이고 있다는 풍문이다. 아내가 그동안 조금씩 수눌음을 해서 최소한의 동네 인력은 확보했다지만, 수확을 마무리하기에는 절대 부족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서툰 농부인 나도, 신들메를 고쳐 매고, 허리띠 바싹 당겨 졸라맬 수밖에 없다.

동구밖에서 겨울의 발자국 소리 저벅저벅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새벽별 보고 나가 달빛 받고 돌아오는 노동의 날들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열매 따고, 화물차에 싣고 내리면서 흥건하게 땀깨나 흘려야 할 것 같다.

벌써 어깨 뻐근하고, 허리 묵직하다. 또 꾀병이 도지기 시작되었다는 아내의 지청구가 시작될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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