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희생 그리고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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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나는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에 가본 적이 없다. 러시아에만 마흔 번 정도 다녀왔다. 러시아 이외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셈인데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2000년의 1월이었는데 선교지에서 러시아의 공직자들과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나에게 앞에 나와서 몇 마디 하라고 했다. 고려인 동포들이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사전에 그런 기회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별 부담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놓인 긴 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연을 날리면서 가느다란 실로 연결했고 그 실에 묶어 조금 더 굵은 줄로 연결하면서 양편을 쇠밧줄로 연결한 다음, 본격적인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별 준비 없이 이렇게 만났지만 앞으로 점차 서로의 관계를 확대해 가자”는 제안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모임의 책임자인 공직자와 꽤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나는 우리는 형제라는 표현을 했다. 형제라는 말을 듣고서 그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나를 그의 고향 시골집으로 데려가서 사람들에게 형제 관계를 알리는 간단한 예식을 집행했다. 그렇게 그는 형이 되었고 나는 그의 동생이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보통명사 개념으로 형제라는 말을 했는데, 러시아의 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받아들인 듯했다. 형은 공화국의 인권위원장이었기에 동생인 나도 위원회에 속하여 한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나는 러시아의 형과 그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나의 특별한 관계는 ‘형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부터 발전해간 셈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형제라는 말을 할 때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습관이 생긴 듯하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전사자의 가정에 전사통지서를 보낼 때 독일정부는 이런 글을 보냈다. 당신의 아들인 고귀한 병사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다”는 내용의 통지서를 보낸 것이다.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독일이 패전하면서 그들에게서 희생이라는 말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희생’은 필수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이후로 독일에서 나온 신학 서적에서 희생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대통령을 하다가 물러서면 어떤 단어 하나가 사라져간 듯하다. 정화라는 단어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국가적 목표처럼 정화를 외쳤던 대통령이 그 자신이 정화의 핵심 대상이 되면서 물러선 이후로 정화라는 말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공정’이나 ‘분배’라는 단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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