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시대 피해 온 가문들…‘수산파’ 입도조의 흔적
혼란한 시대 피해 온 가문들…‘수산파’ 입도조의 흔적
  • 제주일보
  • 승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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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수산리 수산파 입도조 가문
문맹현·박후신·서희례 등 수산리 정착해 후학 양성 힘써
지하수 혁명 심정굴착 1호 마을…동산지역 주거단지 형성
서부장동산 전경. 서희례는 1613년 수산리에 낙향, 서당을 열고 학동을 훈학했다. 그가 묻힌 묘 부근을 서부장동산이라 부르고 있다. 수산리 외곽지역에 있는 서부장동산에는 서희례와 그의 아들, 손자의 무덤이 있다.
서부장동산 전경. 서희례는 1613년 수산리에 낙향, 서당을 열고 학동을 훈학했다. 그가 묻힌 묘 부근을 서부장동산이라 부르고 있다. 수산리 외곽지역에 있는 서부장동산에는 서희례와 그의 아들, 손자의 무덤이 있다.

진씨(秦氏)가 설촌했다 해서 주진촌(住秦村)이라고도 불리는 수산리는 유독 수산파라 불리는 입도조들이 많은 편이다. 그중 남평문씨 수산파 입도조인 문맹현, 밀양박씨 입도조인 박후신, 이천서씨 입도조인 서희례에 대하여 기술한다.

남평문씨 수산파 입도조 문맹현

문맹현(文孟賢)1435년경 제주로 건너와 애월읍 수산리에 정착했다.

경남 산청군에 거주하던 중 1406년에 일어난 종친 가학의 난을 피해 다니게 되었는데, 부모·형제들은 전라도에 정착하고, 막내 문맹현 혼자서 제주 바다를 건너 수산리에 정착했다.

문맹현은 어려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서당을 열고 후학을 훈육하니, 배움을 청하는 자가 많아 서당이 다 수용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부인 제주고씨와 함께 수산리 동쪽 300m 지점인 애월읍 하귀리 학원동(서돌전)에 묻혔다.

슬하에 둔 삼 형제와 그 후예들이 번성해 애월읍 수산리·납읍·고성 등을 중심으로 전도 일원에 분포돼 있다.

박후신의 부친 박숭지 교지.
박후신의 부친 박숭지가 받은 교지.

부자의 교지를 가보로 전승하고 있는 수산리 박씨 종가

박후신이 제주에 들어온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이다. 그가 통훈대부로 홍문관 정자의 벼슬에 오르고 아버지 박숭지 역시 통훈대부로 이조정랑이라는 관직에 있었음에도 제주도로 낙향한 것은 임진왜란으로 가문이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막고 난세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입도조 박후신을 파조로 해 정자공파가 이루어졌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했던 박후신은 제주도로 낙향 후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해 교학 진흥에 기여하는 바 컸다.

박후신은 입도 당시 선조 임금이 내린 발령 교지와 부친인 박숭지의 교지를 지니고 내려와 후손에게 전했다. 오늘날 애월읍 수산리에 있는 정자공파 종가에는 두 교지가 가보로 전승되고 있다.

박후신이 선대의 고향인 경상도 창녕을 떠나 처음 정착한 곳은 애월읍 어음리였다. 이 마을 근처에 있는 속칭 정자동산은 정자공 박후신의 행적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와 이웃한 개천의 명칭은 정자내이다. 박후신의 후손들은 애월읍 일대에 퍼졌으며, 종가가 수산리에 있다 하여 세칭 수산박씨(水山朴氏)라 한다.

수산리 서부장동산에 묻힌 이천서씨 입도조 서희례

1571년 출생해 일찍이 소년의 몸으로 무과에 급제한 서희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벼슬이 가선대부, 2품인 훈련원 부수계(副壽階:낙향 이후 마을에서는 훈련원 부장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에 이르렀다. 1613년에 홀로 수산리에 낙향하여 서당을 열어 학동을 훈학했다.

서당 터 또는 서당우영으로 부르기도 하는 서희례가 살았던 집터에서는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이로 보아 수산리에는 오래전부터 서당교육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제주고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훈학을 하며 살았던 서희례의 집터 울타리에는 수령 400여 년으로 보이는 팽나무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그가 묻힌 묘 부근을 서부장(徐副將)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수산리 외곽지역에 있는 서부장동산에는 서희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의 무덤이 있다.

서희례가 입도할 당시의 시대 상황은 임진왜란 이후 보위에 어렵게 오른 광해임금과 대북파가 영창대군의 옥사에 이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 등을 주도하던 혼란한 때였다.

제주에 서씨 성을 가진 인물로 1512년 제주판관으로 내려와 김녕사굴의 큰 뱀을 물리친 전설적인 인물인 서린이 있다.

물 관련 수산리의 역사문화

애월 출신인 남헌 김찬흡 선생은 애월읍의 옛 명칭인 신우면에서 8개의 경치를 선정해 신우8이라 명명했는데, 그중 하나가 수산리의 물미호반이다. 또한, 수산리에서는 호반8을 선정해 마을을 가꾸고 홍보하고 있다.

신우8관 중 하나인 물미호반은 봉수대가 있던 물메오름과 잔잔한 은파(銀波)가 이는 호수가 잘 어울려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미호반 주변에는 역사적인 인물들도 만날 수 있는 무덤군도 있다.

또한, 수산리에는 호숫가의 노송과 마을 제청(祭廳)이 고풍스러워서 이를 문촌고풍(文村古風)이라 표현하고 있다. 유서 깊은 수산봉 서쪽에는 전몰군경을 안장한 국군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산수가 수려한 이곳은 수산리 최초의 설촌지역이라 추정된다.

큰섬지와 뒷못

제주도는 용천수가 많이 솟아나는 바닷가 중심으로 마을들이 들어섰다. 수산리는 중산간 마을인데도 용천수가 많은 편이다. 이런 조건이 조기 설촌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수산봉 서쪽에서 솟아나는 새섬지와 동쪽에서 솟는 공섬지, 그리고 명새왓섬지 등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섬지 또는 샘지는 수산리에서 흔히 말하는 샘의 의미이다.

수산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 수산천 옆으로도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솟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서 발원한 이 물은 지하로 흐르다가 마을 어귀인 이곳 바위틈에서 솟는 큰섬지라는 샘물이다. 설촌과 더불어 이곳 주민들은 수량이 풍부한 큰섬지 물을 주로 음용해왔다. 인근 마을에서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큰섬지 물을 이용해 식수로 해결했다. 이외에도 마을에 산재해 있는 동녘샘지, 새샘지 등의 지명들이 물이 많은 마을임을 보여준다.

뒷못은 수산리 마을 뒤에 숨어 있다 해 붙여진 천연못의 이름이다. 예전에는 주민들의 생활용수와 마소의 음용수로 사용됐다.

이 습지에는 마름·창포·부들 등의 수상식물들과 맹꽁이·개구리 등의 양서류와 유혈목 등의 파충류가 자라고, 왜가리와 철새들이 날아들어 어울리는 자연생태 습지이다. 지금은 나무데크를 놓아 생태공원으로 가꾸고 있다.

바로 지척에는 물메오름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계단과 수산봉 곰솔, 영봉 한라산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이 밖에도 여웃못·장동못·예원못·감남새미() 등의 못이 산재하고 있는 정겨운 마을이다. 뒷못이라는 이름처럼 수산리에는 제주도의 비경과 비사가 도처에 숨어 있는 제주도의 보고이다.

1961년 12월 지하수 개발의 신호탄인 심정굴착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
1961년 12월 지하수 개발의 신호탄인 심정굴착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

지하수 혁명의 상징인 심정굴착 제1호의 마을

수산리는 제주도 지하수 혁명의 상징인 심정굴착 제1호의 마을이다. 시설이 빈약한 당시에는 내리는 빗물 대부분이 다공질로 구성된 현무암 지질 특성상 지하로 흘러 들어갔다.

1950년대 후반 제주도의 물 문제가 현안 과제로 제기되자 제주도(도지사 김영관)1961년 수산리에서 미국 기술진과 함께 수맥을 찾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공수된 심정 굴착기를 이용해 지하수를 개발하는 관정 굴착 기공식을 수산리에서 가졌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심정굴착이 이곳 수산리에서 성공했다.

심정굴착이 이루어졌던 수산리 동산지역에는 새로운 주거단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들에게 수산리에 대한 역사문화를 알리는 것 역시 더불어 사는 지혜이고 세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 이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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