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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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제주4·3이 발발한 후 8개월이 지난 1948년 11월 21일 국방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틀 후인 11월 23일에는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겨울철 입산한 무장대에게 식량 확보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해안선에서 5㎞ 밖 중산간마을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했다. 남아 있는 주민은 물론 통행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중산간마을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토벌대는 피난을 가지 않은 양민을 색출해 처형했다. 소개령을 듣지 못한 양민도 많았다. 하지만 토벌대는 가족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강제 연행했다.

양민들은 삶의 밑천인 가축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동굴에 숨어 지냈다. 며칠만 숨어 지내면 사태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희생됐다.

소개령이 시작되면서 4·3은 대학살의 광풍이 몰아쳤다.

영화 ‘지슬’은 소개령으로 동굴에 숨어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는 1948년 11월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동굴에서 주민 100여 명이 2개월 동안 숨어 지냈던 실화를 토대로 제작됐다. 당시 지슬(감자)로 끼니를 연명하며 은신했던 주민들은 결국 토벌대에 발각돼 희생됐다.

1948년 12월 토벌대는 구좌읍 다랑쉬오름을 수색하던 중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숨어있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메밀짚에 불을 피워 굴에 집어넣었다.

아홉 살난 아이와 여자 셋을 포함해 모두 1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사건 발생 다음날 동굴을 찾은 한 주민은 연기에 질식된 사람들이 눈·코·귀에서 피를 흘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숨져 있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4개월 동안 제주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이 기간 희생자는 9709명으로 4·3당시 전체 희생자 1만4533명의 67%에 달했다.

목숨은 살려준다는 귀순 공작에 양민들이 자수를 했다. 하지만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열린 군사재판에서 2530명에게 형(刑)이 선고됐다. 수형인 중 18~19세 청소년을 포함 민간인 384명이 사형 당했다. 당시 제주에는 교도소(형무소)가 없어서 2146명은 전국 형무소에 뿔뿔이 흩어져 수감됐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수감됐던 많은 도민들이 군경에 끌려가 총살된 후 암매장됐다.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유해를 발굴해 보니 무릎을 꿇린 모습으로 매장됐다.

72년 전 옥살이를 하다가 행방불명된 희생자 349명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6월 8일부터 지금까지 6차례에 걸쳐 210명에 대한 심문 절차가 진행됐다. 진술을 할 때면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다. 유족들의 재심 청구는 전과자 신세로 구천을 떠돌고 있는 원혼들의 한을 풀어주고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검찰은 지난 16일 수형인 8명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적법한 조사절차나 공소제기가 이뤄지지 않았고 판결문도 남아 있지 않아서다.

검찰은 무죄를 구형하면서 “이념 논란을 떠나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운명을 달리한 도민들의 아픔은 누구도 부정 못한다. 늦었지만 상처와 눈물로 버텨온 지난 아픔이 치유되길 바란다”고 했다. 희생자들의 배·보상을 위한 4·3특별법 개정안의 연내 통과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정부는 4·3을 포함, 과거사 보상에 4조8000억원이 필요해 재정 부담을 호소했다.

국가가 합당하게 보상해야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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