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세계에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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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논설위원

얼마 전 서울에서 변시지 화백의 전시가 열렸다. 전시를 보러 가는 발길이 왠지 잠시 서울 살이 하러 간 가족이 잘 지내고 있는지 살피러 가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제주바다를 내려다보니 변 화백과 자주 만났던 천지연 폭포 근처의 로즈마린 카페가 꿈결처럼 어른거렸다. 생전의 변 화백과 바다 옆 카페 의자에 앉아 그림 이야기에 취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던 시절, 마치 화백의 그림 속 선상(船上)에 앉아있는 착각에 빠지곤 했었다.

담소는 늘 반복되는 예술이야기였다. 그런 시간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던 화백은 “제주사(濟州史)는 바람의 역사다. 초가가 다 날아갈 정도였으니 제주사람들에게는 바람을 극복하려는 정신이 있었다. 그 정신을 그리고 싶지만 녹록지가 않다.”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색을 절제하듯 점점 단순하게 그림을 그렸다.

1957년 변 화백은 일본에서 영구 귀국했으나, 당시 서울 화단의 분위기는 예술에서 좋은 것을 좋다고 말 못하고, 나쁜 것도 좋다고 해야 하는 이상한 기류 때문에 피하듯 비원으로 가서 그림을 그렸었다.

“성철스님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고 말할 때는 ‘물’이라는 개념이 ‘산’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무(無)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림에서도 등장하는 그림의 요소를 하나씩 빼면서 있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변 화백의 예술론이다.

“예술의 세계에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없고, ‘미’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예술의 세계는 영원하고 깊고 무한한 것이어서 안주해서는 아니 된다. 내가 알아낸 것도 마치 한강의 모래알과 같다.”라고 말씀하시던 변 화백.

변 화백이 사실주의 경향의 작가라면 제주를 사실적으로 그렸겠지만, 사실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렸다. 제주에서 본 황토 빛으로 섬사람들의 고뇌를 그렸다. 화백에게 제주는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는 섬이었다. 태풍 부는 날, 거센 파도를 보면 고통스러웠지만 환경 극복의 쾌락이 있었다. 오히려 바람 없이 평온한 그림을 그릴 때가 고독한 때였다. 날씨 좋은 날, 아침결 화단에 내리쬐는 햇빛을 보는 순간이 바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화백은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훌륭한 작품은 형태, 선, 색 등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것이다. 변 화백은 그림을 잘 그리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그렸던 모딜리아니의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선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환경에서 훌륭한 화가가 나온다는 것이 변 화백의 지론이다. 바다를 떠나 수족관에 갇혀있는 물고기는 바다에서처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없다. 제주에서 훌륭한 화가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훌륭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볼 때는 느낌이 중요하다. 그림에 대한 지나친 정보 제공은 그림을 스스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과 같다. 그림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그림을 봤는데 뭔가 끌린다.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또 다시 그림을 보게 된다. 이것이 그림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산남, 서귀포에는 매일 지팡이를 짚고 작업실을 오가며 미소 짓던 변 화백의 모습이 그림처럼 남아있다.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언제나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바람 부는 날, 홀로 있어 외로워 보이는 변 화백의 그림 속 꾸부정한 노인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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