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 세월 자연이 만든 마을과 그들의 삶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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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대정읍 송악산·단산 주변 명승
청동기 이후 사람들 터전 마련
송악산, 지질·생물학 가치 높아
역사상 교통·군사 요충지 역할
등록문화재 13개 등 유적 다수
넓은 분화구인 응회환이 형성된 송악산. 5000년 전에 일어난 마지막 수성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오름들로 알려져 있다. 1차의 수중폭발로 넓은 분화구인 응회환이 형성돤 송악산은 2차의 화산활동으로 분화구 속 분화구가 형성된 매우 독특한 화산체이다.
넓은 분화구인 응회환이 형성된 송악산. 5000년 전에 일어난 마지막 수성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오름으로 알려져 있다. 1차의 수중폭발로 넓은 분화구인 응회환이 형성된 송악산은 2차의 화산활동으로 분화구 속 분화구가 형성된 매우 독특한 화산체이다.

대정읍 지역은 수천 년 전의 유적과 함께 송악산과 단산 주변의 명승을 가지고 있다.

바닷가에는 풍부한 용천수, 산에는 꿩과 노루 등의 다양한 동물들, 바다에는 물고기와 조개가 있는 곳인 만큼, 오래전 이곳에 터 잡은 선인들은 산과 바다에서 먹이를 마음껏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주섬의 생성과 대정현의 출현

이곳에서 발견된 40여 기의 고인돌이 말해주듯,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송악산과 단산 주변에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송악산과 동쪽의 일출봉

제주도는 바다 가운데 있지만 늘 섬은 아니었다.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며 해수면이 오르고 내림에 따라 바다에 둘러싸이기도 하고, 대륙에 이어지기도 했다. 제주가 섬이 된 것은 18000년 전쯤의 마지막 빙하기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을 만큼 높다는 뜻을 지닌 한라산. 한라산의 분화구는 하나인데, 동쪽과 서쪽의 암질은 다르다. 이는 두 번 이상의 화산폭발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꿀처럼 점성이 높은 조면암질 용암이 16만여 년 전 바다에서 솟아올라 멀리 흐르지 못하고 돔형으로 굳어졌다.

25000년을 전후해 정상 부분에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이 다시 뿜어져 나와 지금의 백록담 분화구를 형성했단다.

동쪽의 성산 일출봉과 서쪽의 대정 송악산은 5000년 전에 일어난 마지막 수성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오름들로 알려져 있다.

대정읍 단산과 주변 풍경.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읍 단산과 주변 풍경.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1차의 수중폭발로 넓은 분화구인 응회환이 형성된 송악산은 2차의 화산활동으로 분화구 속 분화구가 형성된 매우 독특한 화산체이다.

이렇게 형성된 송악산은 분출 당시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새 발자국 화석도 발견돼 화산지질학과 생물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 남서쪽 해안가에 인접한 대정읍 상모리 일대는 공렬토기(孔列土器)들이 가장 많이 발견된 지역이다.

이 토기들은 기원전과 기원후에 걸쳐 이루어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1988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상모리 유적에서는 생활유적과 패총유적도 함께 확인됐다.

상모리 유적에서 발굴된 공렬토기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안성·인성·보성·구억·신평 마을을 품은 대정고을

예로부터 안성·인성·보성 세 마을을 품은 대정골은 넓은 들판과 함께 모슬봉(186m)과 단산(160m)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곳이다.

제주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신평곶자왈이 펼쳐져 있는 이곳 주변은 고려말부터 형성됐다고 전하는 검은굴 도요지(구억리)와 노랑굴 도요지(구억리)에서 보듯 흙과 물이 풍부한 곳이다.

안성리 설촌 유래 표지석.
안성리 설촌 유래 표지석.

대정고을의 역사문화를 바로 알고 길이 보존하기 위해 대정고을 연합청년회에서는 새로운 천년을 맞은 2000년에 안성리와 인성리 그리고 보성리 등지에 다음의 내용을 담은 표석을 세웠다.

대정고을은 동쪽에 단산과 산방산, 서쪽에는 모슬봉이 넓게 외곽을 이루고 있는 용암평원으로 돼 있다.

대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대정현을 설치했던 1416년 당시 대정고을 서쪽에 한괴현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한괴 는 이름에서 한은 크다, 많다의 뜻이므로 큰대() 자로 하고, 괴는 조용하고 정숙한 곳이므로 고요정()으로 하여 대정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대정고을의 설촌유래는) 삼국시대 중엽(서기 65) 한라산 화산폭발로 후기 씨족사회가 태동하기 시작하며 여러 씨족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산북의 대촌(제주시), 서남의 산방촌(대정), 동남의 토산(정의)이 중심을 이루고, 그곳에서 점차 사방으로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현 지방은 서쪽은 판포리를, 동쪽은 법환리를 경계로 해 제주목과 정의현과 분리되었다. 산남지역은 동서 거리가 멀어 적의 침입이 있을 때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416(태종 16) 안무사 오식이 계청(啓請: 임금계 아룀), 동에 정의현과 서에 대정현을 설치하여 방위태세를 갖추게 됐다.

1418년 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대정성(성벽 둘레 4,800, 높이 174)을 축성한 후 주민들이 성을 중심으로 부락이 형성됐으며 동쪽 마을을 동성리, 서쪽마을을 서성리라 했다. 1879년 동성리는 안성리로 개칭되고, 1891년 안성리에서 인성리가 분리되고, 1915년 안성리 상동 마을이 구억리로 분리돼 오늘에 이른다.

서성리는 1887년 보성리로 개칭되고, 서성리 서북쪽으로 신평리 마을이 들어선다. 이렇듯 안성, 인성, 보성, 구억, 신평 5개 마을을 합쳐서 대정고을이라 불려 왔다

대정읍 등록문화재

오래전 송악산 서남쪽 마을인 산이수동 앞에는 무진장한 조개와 물고기가, 송악산에는 나무 열매와 사냥 자원이 풍족했을 것이다.

동서양의 교통이 열린 근세에 와서는 모슬포는 요충지가 되어 외국 선박과의 접촉이 이뤄졌고, 최근세에는 동북아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일본의 대륙침략의 병참기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제1훈련소 창설로 국군양성의 요람이 되었고, 최근에는 송악산의 자연경관과 함께 많은 역사문화 유적을 간직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를 간직한 대정읍에는 등록문화재가 13개소, 제주도기념물이 3개소, 천연기념물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김정희 종가 유물 일괄(보물 제547-2)과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사적 제487)가 있으며, 제주 연안 연산호 군락(천연기념물 제442), 마라도 천연보호 구역(천연기념물 제423),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 산지(천연기념물 제464)가 있다. 또 대정읍 동일리 서산사 소장 목조보살좌상 및 복장 일괄(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0)과 제주도 옹기장(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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