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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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 수필가

며칠 전, 우리나라 24절기 중 스무 번째인 소설(小雪)이다. 공항으로 가는 아침, 길목을 장식하며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은 밤새 바람에 쌓이고, 흩어져있는 낙엽 군상이다. 초승달 닮은 개나리가 핀 것이 어제였건만, 누릇누릇 한 숲 사이를 가고 있으니 말이다. 계절마다 느끼는 감회가 다르지만 올가을은 나에게만큼 잔인하고도 절절했다. 비에 젖은 낙엽이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달력을 한 장 남기고 있는 11,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큰 언니가 한국에 왔을 때, 그녀와 열흘간의 동거는 나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종종 한국에 오긴 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언니와 얼굴만 다를 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거의 그녀와 비슷했다. 그녀가 자주 갔던 종로 서적, 학림다방, 필하모니그녀가 좋아했던 샤르트르, 시몬느 보브아르에 빠져 있던 대학 시절, 나는 전혜린한테 심취해 있었다. 젊은 시절에 함께한 추억은 많지 않았지만 언니와 마주하면 닮은 꼴의 다른 내가 앉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 밤,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한국에서 살았던 세월이 추억이고 미국에서의 삶이 현실인 그녀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은 그대로였다.

, 제주도니? .” 잠시 머물다 육지로 가면 좋으련만,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정착한다는 말에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나는 화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에

언니, 이 옷 잘 어울릴 것 같은데어때?” 상표를 그대로 간직하며 주인을 기다리듯 장롱 속에서 묵은 향을 내고 있는 것들.

작년 이맘때 고즈넉한 성북동의 한옥 집 입구에는 대추가 붉게 익어 가고 있었다. 처마 밑에 걸려 있던 풍경 소리가 비온 뒤라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자매는 대추차와 호박범벅을 주문하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생각하는 로댕이다. 언니는 이집트의 조각상 파티마 헤스처럼 양쪽 다리를 세우고, 어깨를 약간 웅크리고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육각 소반에 주문한 차와 범벅이 나왔고, 빨간 대추차가 검붉은 색깔로 변해 진국이었다. 언니는 동생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에 뿌듯해했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에 관하여 전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공부 끝나면 올라올 거지?”

그럼, 정착하지는 않을 거야.” 이로부터 일 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나는 마음이 바뀌었다. 언니는 그때의 약속과 기억을 곱씹으면서 다그쳤다. 그녀는 나에게 새로움에 노출된다는 것은 다시 처음부터 밟아가는 기나긴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언니, 많이 익숙해져가고 있어.” 즐거운 요즘, 새로움은 사막을 지날 때 만나는 오아시스와 같은 촉촉한 단비였다. 비록 외로움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 오로지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라는 존재가 살아 있음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동생을 이해하리라 믿었는데, 지금 언니의 행동은 본인의 생각을 관찰시키려고 할 뿐이다. 오랜 침묵 끝에 언니, 와인 한잔할까?”

바람소리에 갈잎들이 속삭이는 가을밤, 처절하게 혼자가 되어 본 사람만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낸다고 했던 그녀가 지금은 부대끼며 살아가라고 하고 있다. 혹한 겨울로 향하는 늦가을의 바람이 결코 녹녹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지 않다. 무소의 뿔처럼 우뚝 서서 나의 길을 가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피붙이가 남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난 살아가고 있는데 나를 보는 그녀는 방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지켜봐 주면 안 되는 걸까. 언니는 밤새 뒤척이는 듯, 지우다 쓰다 한 편지 한 장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나의 동생 보아라.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너의 방황의 끝도 함께 묻어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알을 까고 나와 아프락싸스에게로 날아간 새처럼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위한 힘겨운 움직임에 다시 너의 자신을 실어 보길 바란다.>

공항에서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가을을 세 번이나 보내 버린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 게 아니란 것을, 한 치의 구김살도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겨울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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