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보, 제주 반란 진압 공로
문충세, 제주 초대 우도지관
문형순, 4·3 당시 경찰서장
뭇세, 제주 선교 프랑스 신부
미마 요네기치, 일본인 교육자
▲문충덕文忠德:생몰년 미상. 탐라의 왕자(王子). 문신보(文臣甫)의 아들이고 문충보(文忠甫)의 동생이다.
1419년 9월에 제주에 전제(田制)를 실시하기 위하여 양전(量田)하고자 할 때 고득종(高得宗)과 함께 아뢰기를 “제주는 멀리 해중에 있어서 조세(租稅)를 받아 비축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만나면 사람들이 자생할 바가 없어 굶주려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지금 나라에서 관대한 법전을 좇도록 내리시고 양계(兩界)의 양전 예(例)에 의하여 조수법(租收法)을 세워서 불우(不虞)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주의 토지는 본래 요박(嶢薄)하므로 농부가 햇빛 잘 드는 남묘(南描)에서 부지런히 일을 해도 공은 백배나 되지만 항시 양식이 모자랄까 걱정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농업을 하지 않고 상업에 힘쓰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타량(打量)할 때에 산전(山田)과 사전(沙田)은 비록 본조(本朝)의 전세에 의하여 모두 삼갑(三甲)으로 강등한다 하더라도 인심은 구습에 젖어서 오히려 무겁다 하며 조세를 수납할 때면 근심과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때에 따라 편의하게 제정하여 인정에 맞게 하고 토속(土俗)에 알맞게 하라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사전(沙田)과 산전(山田)은 혹은 오갑(五甲) 육갑(六甲)으로 내려 타량하여 조세를 관대히 하시면 민심은 놀라지 않고 공사 양쪽이 편한 것입니다.”하였으므로 임금이 가납(嘉納)하시고 “편의에 따라 측량하여 원망이 없게 하라”라고 하셨다.
▲문충보文忠甫:생몰년 미상, 일명 문충걸(文忠傑), 반란자 진압 처단자, 탐라의 왕자 문신보(文臣甫)의 장자. 왕자직(王子職)을 계승하였는데 1376년(우왕 2) 5월에 합치(合赤) 강백안(姜伯顔) 등 13인이 음모해 만호 김중광(金仲光)과 더불어 그들을 잡아 죽이고 그의 처자들은 광주와 나주로 유배하였다.
그 후 조선 태조(太祖)가 등극하니 1395년(태조4) 상경하여 양마 7필을 헌납하니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판삼사(判三司) 정도전(鄭道傳)에게 한 필씩 나누어 주고 충보에게는 음식을 하사(下賜)하였다.
▲문충세文忠世:?~1406(태종6), 태종 때의 탐라의 왕자. 제주 우도지관(右都知管).
탐라 왕자 문신보(文臣輔)의 아들이다.
조선조가 개국하고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1402년(태종 2) 탐라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로부터 ‘성주·왕자’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성주의 호칭은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또 왕자의 칭호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관제가 변경된 것이다.
이로써 문충세는 초대 우도지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탐라의 독자성은 그 일부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문형순文亨淳:1901(광무5)~1953,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 광복 후에 월남, 제주4·3사건 당시 ‘마을-축성’ 제안자, 중국에서의 항일활동. 초대 성산포경찰서장.
1948년 4·3 사건이 일어나자 경찰력을 강화하게 되어 당시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 외에, 1949년 1월 성산포경찰서와 모슬포 경찰서(서장 강문식)를 신설하였다.
이때 초대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임명되어 1년 11개월을 재임하고 1950년 12월 1일 떠났다. 늘 소신 있는 경찰 행정을 펼쳐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사나이다운 배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반도(叛徒)들의 마을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도내 각 촌락마다 축성(築城)공사가 이루어졌다. 4·3 당시 이 축성작업으로 마을마다 성 주변에 보초를 세워 반도의 동정을 살피고 반도들의 마을 습격을 저지함과 동시에 반도들과 주민 간의 연락·지원을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는 보도연맹(輔導聯盟) 맹원이나 용공분자들에 대한 예비 검속이 실시되었다.
군부의 명령에 의하여 제주에서도 예비 검속을 실시, 각 경찰서별로 체포 구금시켰다.
당시는 계엄령이 발포된 때라 경찰도 군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문 서장만은 이 군부의 명령을 거부한 의인(義人)이었다.
한 세기가 바뀌고 4·3 사건을 재조명되면서 많은 양민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잉태되기 시작하였다. 문 서장은 독립 운동가이나 공적 증거 자료 미비로 국가보훈처의 지원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향민으로서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6·25 와중에 타계했다. 모슬포 거리에는 그의 공로비가 세워졌다.
▲뭇세:1876~1957, ‘뭇세’(Mousset, Jean, Germain)는 한말의 선교사. 프랑스 신부. 파리(巴利)외방전교회 회원, 한국 성씨로는 문(文)제만 신부, 본명은 뭇세(Mousset, Jean Germain.). 1900년 10월 한국에 와서 이듬해 5월 10일 제주도로 들어왔다.
이때 구마슬(具瑪瑟) 신부는 제주성당을 맡고, 문제만·김원영(金元永) 두 신부는 산남 서홍(西烘)리 ‘한논’성당을 맡아 전교하였다.
1901년 신축교란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던 구마슬 신부와 문제만 신부도 민란이 진압되자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교도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미마-요네기치:1883~1925(일제강점기), ‘미마-요네기치’(美馬-米吉)는 일본인 교육자. 일제가 기피하는 자유주의 교육자로서 국경을 초월한 친한파(親韓派), 제주농업학교의 제3대 교장. 1920년 4월 교사로 부임하여 교장으로 승진. 1925년 5월에 재임 중 죽었다.
일본 도쿠지마현(德島縣) 나하군(那賀郡) 견능림촌(見能林村)에서 미마-다메기치(美馬爲吉)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7월 한반도로 건너와 평안북도 의주(義州)농업학교 교유로, 1916년 5월 대구(大邱)고등보통학교 교유로 재임, 1920년 제주농업학교 훈도로 들어와 이듬해 교장사무취급으로, 1923년 10월 교장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인도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초대 제주도체육회장이 되어 여러 가지 운동 종목을 제주에 보급하였으며 항상 미국식 민주주의를 찬양하여 당시 도사(島司) 마에다-센지(前田善治)와는 반목이 심했으나 교장이 도사보다 직위가 상위여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1924년 10월 10일 처음으로 도외 수학여행을 실시하여 부산·대구·경성(京城)·인천·수원·성환(成歡)·광주·목포를 거치면서 9박 10일간에 걸쳐 견학하였다.
1925년 10월 8일 11시 학교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도민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그의 유해는 일본으로 옮겨져 고향 약사암(藥師庵)에 묻혔다. 오현단에 도민의 이름으로 미마-요네기치 송덕비가 세워졌다.
일본인이면서 제주도민들에게 오래 추모의 대상이었으나 조국의 광복이 되자 그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현단(五賢壇) 비석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