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인의 흔적과 자취, 그리고 마을의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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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안성리·상·하모리 설촌 유래
동성리, 호적중초로 유배인 관리…인구 동태·호구 편제 등 기록
포구 발달 해안마을 형성, 하모리·일과리 등 샘물 중심 마을 설촌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리 서림물과 전분공장 모습. 일과리를 비롯해 주변 마을은 오래전부터 용천수인 샘물 중심으로 마을이 이뤄졌다. 또한 근처에 고구마 전분공장이 있어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1416(태종 16) 대정현이 설치되고, 1418년 현감 유신에 의해 대정현성이 축조되면서 마을 이름을 성안으로 불러오다가, 성안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불어남에 따라 1518년 성의 남문과 북문을 경계로 동쪽은 동성리, 서쪽은 서성리라 하여 두 마을로 나누게 되었다.

1879년 동성리를 안성리로 바뀌었고, 1891년 안성리에서 인성리가, 1915년 구억리가 각각 분리됐다.

안성리 설촌 유래

안성리에는 대정현의 설치와 함께 대정향교·송죽사·대정서당 등이 위치했다.

또한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 등이 유배 중 남긴 학문과 자취가 남아있는 마을이다.

1887년 보성리로 개칭된 서성리에는 대정원이 자리 잡았다.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에는 동헌청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동헌청 자리에 대정면사무소가 있다가 화재로 소실됐다.

사창터였던 곳은 주재소가 있었는데, 1931년 모슬포로 옮겨갔다.

기록사랑마을 비석.

국가지정 제3호 기록사랑마을 안성리

제주에 도착한 유배인들은 제주목에 가서 신고를 한 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 있는 유배지로 떠났다.

각 마을에는 유배인을 보살피는 집주인(保授主人)이 있는데 권세가 높은 양반은 좋은 주인을 만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형편이 어렵거나 유배인의 신분이 낮은 경우에는 직접 집과 음식을 마련해야 했다.

유배인들은 그 마을의 호적대장에 올라 관리됐다. 대정현 동성리에는 평안도·경기도·전라도 등 전국에서 온 유배인들이 살았는데 호적자료에 의하면 4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사람도 있다.

대정현 동성리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된 곳이었는데 그의 보수주인이었던 송계순과 강효범의 호적도 살펴볼 수 있다. 추사와 동계 등이 유배되었던 대정현 동성리 마을에서는 호적중초로 유배인들을 관리했다.

호적중초는 호적대장의 저본(底本)으로 리·통 단위로 3년 간격으로 식년(式年)에 작성했고 인구의 동태 파악, 호구의 편제, 가구의 구성, 노역, 군역의 증발에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구성원, 상민, 노비, 죄인 등의 신분계급을 비롯해 지장(종이장인), 궁장(활장인) 등 특수 직업인, 유배인 등 당시 지역의 인구 및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1843년은 김정희 선생이 유배온 후 3년이 지난 해로, 김정희의 첫 번째 보수주인이자 그를 호송해 온 송계순과 두 번째 보수주인인 강효검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김정희가 거처했던 곳은 마을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의 집이었고, 강효검의 손자 강도순과 강도훈은 김정희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김정희의 유배 초기 적거지는 대정현 교리 송계순의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겼다.

1843년 대정현 동성리 호적중초 192호에는 호주 강효검(나이 69)에 대해 기재돼 있다. 강효검 호주 밑에 그의 손자 강도순(나이 27), 202호에는 조방장 송계순(나이 35)이 호주로 기록돼 있다.

권위가 있는 유배인은 종들이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담당하기도 했다.

추사가 유배생활 했던 안성리는 국가가 지정한 제3호 기록사랑마을이다.

대정고을 설촌유래 안내석.

·하모리와 이웃 마을 설촌 유래

상모(상모슬포)리와 하모(하모슬포)리의 설촌은 1416년 대정현이 설치된 지 80여 년이 지난 뒤에 들어선 모슬진 설치와 관련이 깊다.

하모리 통적(1771)’에는 모슬진에 배치된 군사직인 관방(關防) 인원 때문에 인구가 급증했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해안에 용천수가 발달돼 식수가 풍부한 이곳에는 방호소와 돈지동과 영수동 등의 마을이 형성돼 영리(營吏)와 군졸들이 이주해 살았다.

또한 모슬포에 포구가 발달돼 해안마을에서도 중심지가 형성됐다. 이후 최남단 해안마을인 저근개마을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비행장 건설로 폐동됐고, ‘골못마을도 비행장 건설 여파로 다른 마을(서동)과 통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알뜨르에 마을이 형성되고, 4·3에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으로 더욱 많은 주민들이 모슬포로 옮기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곳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용천수인 샘물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신영물의 하모리, 두레물의 인성리, 서림물의 일과리, 세미골 홍물의 동일리, 궤물과 고도물의 구억리, 봉개통과 산물곶의 신평리, 산지물의 신도리에서 보듯 샘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모동장을 관리했던 목감과 목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인 무릉리는 19세기 초 신도리인 돈포리에서 분리돼 독립된 마을이다.

대정현을 설치할 당시 신도리에는 인가가 없었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이세번이 1522년 대정현 둔포(돈포)에 유배돼 적거생활를 하다가 사망해 현 고산리 신물경에 안장됐다.

그 후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신도리에는 1794년 이 마을 출신인 변경붕이 문과 급제하면서 마을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가 대정현감이 되던 1811년 도원리로 개명됐다.

1811년 경 대정현감 변경붕이 모동장 서장 마을인 둔포리를 도원리로, 중장 마을 구목(枸木)리를 무릉리로 개칭함에 따라 이웃 마을의 명칭에 맞춰 영락리라 이름 붙였다.

1840년 영국군함이 가파도에 정박해 흑우를 약탈하자, 관에서는 나머지 흑우들을 현재의 영락리 지경인 모동장(毛同場)으로 옮겼다.

설촌 당시의 호구단자에 의하면 1852년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농지를 개간해 설촌의 기반을 닦은 다음 1854년 영락리를 설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슬포의 설촌유래

모슬포에는 동서 양쪽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쪽은 상모리 동북 속칭 들메기 라는 곳과 서쪽은 하모리 서남 해안 속칭 논물거리(답수항)라는 곳에서 설동이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상모리 설동지인 들메기에는 동쪽 지방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 정씨·문씨·허씨 등이 중문 또는 서귀 쪽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진다.

하모리 설동지인 논물거리에는 서쪽 지방인 일과에서 넘어온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부 이씨가 논물거리 동쪽에 처음으로 살았던 당시에는 일과리와 하모리의 마을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다.

논물거리가 하모리 지경으로 확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에서 실시한 토지세부측량 이후이다.

모슬포 폐동지로는 들메기, 잘왓, 중모슬리(상모리와 하모리 사이 비석거리 동산 아래 설촌), 알오름(일제에 의한 송악산 출입금지로 폐동), 무수물(걸메물 남쪽 마을로 비교적 일찍 설동됐으나 19세기 말 폐동), 논물거리, 저근개(가파도와 가장 가까운 해안마을로 일제에 의해 폐동), 광대원(멸치를 잡기 위한 원이 있는 마을이나 일제의 군사비행장 시설로 폐동), (광대원 마을 북쪽의 순비기나무가 무성한 모래톱 근처 마을) 등이다.

반면 멜캐라고도 불리는 쇠머리동네는 처음에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조근개, 광대원, 못 등이 폐동되면서 모여든 주민들에 의하여 큰 마을이 되고 행정리가 되었으니 지금의 하모1리가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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