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성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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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경기옛길 의주길
조선시대 6대 도로 완성…한양에서 의주까지 1번 대로
대륙 연결 교통로, 일부 구간 복원돼 여행객 발길 이어져
경기옛길 의주길 트레킹 코스 중 제1길인 벽제관길의 벽제 천변길 주변 전경. 벽제관길은 삼송역에서 출발해 벽제관지까지 이어진다. 3호선 삼송역 주변은 수도권 북부의 교통 요충지로, 의주대로 원 노선이 지나던 바로 이곳이 경기옛길 의주길의 출발점이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 길에 나선 후 날이 훤히 밝아 도착한 곳이 삼송이고, 두어 시간 후 아침식사를 한 곳이 벽제관이다. 

40대 초반의 연암 박지원은 나랏돈으로 대륙 여행에 나서는 행운을 얻었다. 청나라 황제 칠순 축하 사절단에 끼게 된 것이다. 압록강 건너 요동 벌판과 선양 그리고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인 산해관, 이어서 북경에서 몽고 고원 근처인 열하까지 장장 5개월에 걸친 긴 여행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좁은 우물이었는지 바깥세상은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지, 연암은 여행을 통해서 절실히 깨달았다.

한양을 출발한 연암이 압록강까지 가슴 설레며 보름을 걸었던 길이 의주대로다. 대륙 여행에서 돌아와 집필한 열하일기2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연암이 이런 대단한 여행서를 구상한 것도 대륙 여행을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 한양까지 걸어오는 길, 의주대로 위에서였을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며 통치자들의 필요에 의해 하나둘씩 조성된 우리 한반도의 길들은 조선시대에 6개 주요 간선 도로망으로 완성됐다. 수도 한양을 중심에 두고 방사형으로 퍼져 전국을 이었다. 북녘으로 둘,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각각 하나씩, 그리고 남쪽으로 두 갈래의 길이 번호까지 달고 대로(大路)’라는 이름으로 뻗어 나갔다.

도산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의주대로는 서북지 의주 일대로(西北至義州一大路)’, 영남대로는 동남지 동래 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로 표기하고 있다. ‘한양에서 서북쪽 의주로 향하는 1번 대로’, ‘한양에서 동남쪽 동래로 향하는 4번 대로쯤으로 각각 풀이될 수 있다.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오갔던 길이 1번 대로요,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걸었던 길이 4번 대로였다. 두 길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아픈 과정을 오롯이 함께 겪기도 했다. 의주대로는 한양을 떠나 북으로 향하는 선조 임금의 한숨과 백성들의 원성의 소리를 들어야 했고, 영남대로는 한양으로 향하는 왜군들에게 본의 아니게 길잡이 노릇을 해주면서 동시에 짓밟혔다.

의주대로의 종착지인 의주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의주목 또는 의주군으로드넓은 하나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쪽의 신의주시와 서쪽의 의주군으로 양분되어 있다. 대륙 진출을 꾀하던 일제가 1905년 한양-의주간 경의선 철도를 개통한 후 둘로 나눴다. 당시 일본은 철로가 들어선 지역 일대를 본격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주란 뜻의 신의주로 명명했다. 의주대로가 경의선 철로로 대체되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의주대로는 조선을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6대 간선도로 중 고산자 김정호가 1번을 달아준 이유다. 오랜 세월 묻혔던 옛길이 경기도의 노력으로 일부 구간이 복원돼 현대인들의 발길을 맞아들이고 있다. 옛길을 걷는 시간은 역사와 만나는 여정이다.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성찰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도의 옛길 복원 사업은 의미가 크다.

전남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뻗어있던 1번 국도는 고양시 삼송역에서 경기 북부를 서울과 잇는다. 삼송역 주변은 수도권 북부의 교통 요충지인 셈이다. 의주대로 원 노선이 지나던 바로 이곳이 경기옛길 의주길의 출발점이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 길에 나선 후 날이 훤히 밝아 도착한 곳이 삼송이고, 두어 시간 후 아침 식사를 한 곳이 벽제관이다. 어가 행렬이 비 맞으며 지나간 의주대로 그 구간은 현재 차량 통행이 많은 국도로 변해 있다. 삼송역에서 공릉천까지는 1번 국도로, 공릉천에서 벽제관지 근처까지는 39번 국도로 변모한 것이다.

경기옛길 의주길 지류인 송강누리길 공릉천 주변 정경.

의주길 제2길은 벽제관지에서 대자산을 넘고 옛 고양 관청이 있던 마을 뒤 관청령을 넘어 파주로 들어서는 길이다. 원 노선은 파주와 고양의 경계인 동쪽 혜음령을 넘는 루트였으나 지금은 혜음령 터널까지 뚫린 78번 지방도라 차량 통행이 워낙 많다. 고양에서 파주로 들어선 후 시작되는 의주길 제3길 역시 번잡한 차도를 피해 대체로를 조성했다.

조선시대 때 파주목은 지금의 파주읍을 중심으로 법원읍, 문산읍, 파평면, 광탄면, 월룽면, 조리읍 일대에 해당된다

의주길 제4길은 옛 파주목의 중심지였던 파주읍을 정통으로 누비며 지나기에 그 이름이 파주고을길이다. 이 구간의 옛길 원 노선 역시 두 개의 지방도로 변모해 있다. 전반은 김포 월곶에서 강원 인제를 잇는 56번 지방도이고, 후반은 고양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온 78번 지방도이다.

임진나루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임진각 표지판.

1905년 일제가 급조한 한양-의주간 경의선 철도는 개통되자마자 일제의 만주 대륙 석권과 조선 침탈의 도구로 활용됐다. 결과적으론 한반도의 동남단 부산에서 서북단 신의주까지를 일직선으로 잇는 한반도 대동맥의 역할도 겸했다. 이때부터 영남대로와 의주대로의 많은 역할은 철마가 달리는 철길에 맡겨졌다. 그 철길을 달렸던 철마 중 하나는 지금, 6·25 때 폭격 맞은 형태 그대로 의주길 제5길의 종점인 파주 임진각에 멈춰 서 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면 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 그리고 신의주까지 신기술 고속철이 질주할 것이다. 그리곤 중국과 러시아 대륙을 거쳐 유럽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그리고 의주까지, 걸어서 한 달이 넘게 걸렸던 우리 옛길 영남대로와 의주대로가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세계적 교통 요충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5개 코스 트레킹 루트(53) 1길 벽제관길(7.6) 삼송역 8번 출구~김지남 묘~덕명교비~벽제교~1대 자교~벽제 천변길~빈정 1~벽제관지 2길 고양관청길(6.2) 벽제관지~고양향교~대자산 숲길~연산군 시대 금표비~고읍마을~관청령~용미 33길 쌍미륵길(14) 용미 3~용암사 마애이불입상~서현 추모공원~장곡교~분수 2~윤관 장군묘~분수 2~광탄 삼거리~신산5리 버스정류장 4길 파주고을길(11.6) 신산5리 버스정류장~광탄천~파주초등학교~파주향교~봉서산~중에교~독서둑길~선유 삼거리 5길 임진나루길(13.8) 선유 삼거리~이세화 선생 묘~화석정~임진나루터 앞~임진리 오토캠핑장~장사 1리 마을회관~임진강역~임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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