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조천만세운동 확산 주역…학생들 애국심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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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봉, 서예대전·창작전 수상
박계첨, 추사체 터득, 문하생
박규훈, 서울서 학생 항일 활동
박남호, 오사카 반제동맹 운동
박두규, 조천서 만세운동 주도
광복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가 지난 2009년 12월 22일 박씨 문중 공동묘지에서 거행한 박두규 애국지사 추모비 제막식. 박두규는 1919년 조천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계봉朴季奉()1924(일제강점기)~?, 서예가, 호 일란(一蘭) 혹은 꿈샘, 초등 교사, 대한민국 서예대전 입선, 본관 순창, 제주성안 이도1동의 부자 집에서 태어나 광주 아사이 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하여 제주북교와 서울 이태원(梨泰院)학교 교사로 재임하고 14녀를 기르며 한국부인회 및 대한어머니회 부회장, 새마을부녀회 제주도연합회 고문을 지냈다.

우즈백공화국 대통령 초청 한국작가전 출품, 저서 한글 가정 글씨’, ‘어머니 자녀와의 편지문(便紙文)’, ‘어머니 70생애(生涯)가 담긴 글’, 상훈 알뜰 주부상, 모범 어머니상, 슬기로운 여인상, 신 미술대전 창작전(創作展) 최우수상 등을 수상.

박계첨朴季瞻1824(순조24)~1850(철종1), 선비. 서예가.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 일설에는 추사선생이 방환(放還)되어 상경할 때 함께 따라가 글씨를 배웠는데 질투하는 이로부터 독살당하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일명 박규안(朴奎安), 호는 자기(慈杞), 본관은 밀양 규정공(糾正公)파이며 애월읍 곽지리 과오름에서 박수건(朴秀建)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한 장령 박수룡(朴秀龍)의 당질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대정에 유배와 그의 서예에 대한 솜씨를 인정하고 잘 가르쳐 주었다. 문하생 가운데 박계첨과 대정의 강도순(姜道淳), 제주 성안의 김구오(金九五) 3명이 가장 글씨를 잘 써서 추사체를 터득하였다.

추사는 제주 성안에 들려 김구오를 격려하고 돌아가다가 곽지 마을에 들려 박계첨 댁에 며칠 머물고 갈 정도로 친숙하여 전해지는 말이 많으며 이 마을에서는 추사체의 글씨가 많이 남았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매우 좋아해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후손은 곽지 마을에 없고 다만 장령의 증손 박경후(朴景厚)4·3사건 직후 상가리 상 더럭에서 고내리로 옮겨 살았다.

박규훈朴圭壎1900(광무4)~1975, 기미년 독립만세 당시 서울에서 항일 학생활동. 이후 경기도 송고(松高)주식회사 공장장, 또 조선직물회사 등을 운영, 본관은 순창, 박이민(朴离旼)의 아들로 제주시 이도리 과양에서 출생, 청년운동가 박교훈(朴喬壎)의 아우이다.

191931일 당시 서울 권농동 64번지 최봉환 댁에 살았다.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학생으로 서울 탑동(塔洞)공원에서 진행된 독립선언 행사에 참가, 다수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로 행진, 또 학교 앞에서 전단 60여 매를 살포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38일 하숙집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보통학교 동창생인 제주도 성내 한길 골(大路洞)’에 거주하는 홍형표(洪亨杓, 만농 홍정표(洪貞杓)의 친형)에게 보냈던 223일 편지 “2천만의 대표자가 되어 대항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운 이 글을 보거든 찢어버려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낸 것이 들통이 났다.

또 종형에게 보내려 37일 밤에 쓴 나는 조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연일 시위운동을 하고 학교는 동맹휴교에 들어갔다.”는 편지도 증거로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동년 1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한편, 유학생 한상호(韓相鎬), 송택훈(宋澤薰), 황청하(黃淸河) 등과 함께 영주학생친목회의 핵심 인사로서 19218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귀향 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후일에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인이 경영하는 일본 고베(神戶)시 염료(染料)회사의 시험실에서 다년간 근무, 이어 경기도 송고(松高)주식회사 공장장으로 또 조선직물회사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국 광복 후 1946년 조선대화(朝鮮大和)방직주식회사 사창동(社倉洞) 공장장으로 취임한 바 있다. 197598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광복절을 기하여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남호朴南浩1911(일제강점기)~?, 반제동맹(反帝同盟) 오사카지부 활동, 본관 밀양, 박평준(朴平準)의 아들, 대정읍 보성리 대전골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통항조합 운영을 민족자존의 사업으로 전개, 방향전환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였다고 하여 1938717일 피검되고 동년 1012일 오사카 지방 재판소에서 금고 4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933215일 동아통합조합은 임시 대회를 열어 방향 전환을 결정하자, 박남호, 성자선(成子善) 등의 반대파는 지원을 받아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렸지만 이들은 곧 피검되고 말았다.

그 후 일제에 의해 감시를 받던 박남호는 19387전쟁으로 오사카의 공장은 문을 닫고 있다. 일본이 전쟁에 이기고 있다고 하지만 최후에는 중국이 이긴다. 신문보도에 일본이 이기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이다. 일본이 중·일 전쟁에 이기든 지든 우리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한 것

이다.

박두규朴斗圭1896(고종33)~?(분단시대),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미년 조천 만세 운동 등의 항일 활동, 황해도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았다. 본관은 밀양, 박희형(朴熙亨)의 장남으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함덕리의 문사 김석종(金錫琮)의 문하생,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 1916325일 졸업하고 조천의 신명사숙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거족적인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제1차 군중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동 24일까지 제4차 시위행진이 계속되었는데 제1차 시위운동 당시 일경에 체포당하였다.

이 운동을 주동한 14동지 중 유일하게 교사 신분으로 참여, 특히 신명사숙의 학동들을 동원하여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의 역할을 다하였다.

1919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동년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원심판결에 의해 형이 확정되자 옥고를 치렀다.

동년 1119일 미결 기간을 합쳐 형만기(刑滿期)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 외도도그내의 도근천(都近川) 근처에서 제지공장을 차려 창호지·백지 등을 생산하였으나 늘 일제 당국의 감시와 미행이 심하자 멀리 떨어진 황해 바다의 연평도(延坪島)로 건너가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뒤에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취하면(取下面)으로 옮겨 막걸리공장을 경영, 19458월 조국이 광복되어 38선으로 분단되니 가족들과 함께 눌러앉아 살았다.

19506·25 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1·4후퇴 때 부인 양춘석(梁春錫)은 여덟째 아들 전해(銓解, 6)만을 업고 남하에 성공, 제주로 들어와 조상에게 향화(香火)를 잇게 하였다. 전해란 이름은 해방둥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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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20-12-30 18:43:57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