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로부터 제주 바다 지킨 천혜의 방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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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조선 9진과 봉수·연대
임진왜란 이후 해상정책 강화
화북진·조천진 등 9진 구축
윤창형 목사, 모슬진성 축성
대정읍 관내 서림연대 등 위치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리에 위치한 서림연대. 제주도기념물 제23-22호로 지정된 서림연대는 1977년 보수됐다. 북쪽으로 우두연대, 남쪽으로 무수연대와 교신했다.

조선초 왜구의 방어를 위해 하삼도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속한 바닷가에 위치한 읍성들이 전국적으로 정비됐다.

제주도 역시 이 시기에 세 읍성으로 분리되어 축조됐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방어시설

1439년 제주도 안무사 겸 목사인 한승순의 건의로 대대적인 방어시설 정비가 이루어져, 수산·차귀·서귀 방호소에 성곽 구축이 시작됐다.

1510년 발생한 삼포왜변을 전후해 제주목사 장림의 건의로 성이 없던 제주목의 조천관포·김녕포·애월포·명월포, 정의현의 서귀포, 대정현의 동해포에 성이 축조됐다. 특히 우도로 왜구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녕방호소를 별방(하도)으로 옮겨 축성했다.

1510년 삼포왜란, 1555년 을묘왜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바다방어정책인 해방정책이 강화됐고, 제주도 방어시설의 수축이 계속 이루어져 9개의 진인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으로 굳어졌다.

조선초기 제주도에서의 방호소 또는 진으로 불렸던 곳은 조선 중·후기에는 9진으로 정착되고,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됐다. 9진이 정착되기 이전에는 수전소가 먼저 방어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화북포·조천포·어등포·애월포·명월포·열운포·서귀포·모슬포 등에 수전소가 있었지만 조선후기에 폐지됐다.

통신시설로는 산악을 연결하는 25봉수대와 해안선을 후망하는 수많은 연대(후에 38연대로 정착)가 이루어졌으며, 고려시대 이후로 해안방어를 위해 쌓은 환해장성이 조선시대에도 개축 또는 증축됐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인성·보성리 일대에 있는 성곽인 대정현성. 

모슬진성과 대정현성 소속 수전소·봉수·연대

모슬포에는 탐라순력도의 모슬점부에서 보듯이 제주 9진 중 하나인 모슬진성이 있었다. 모슬진성은 1675(숙종 원년) 어사 이선(李選)이 조정에 건의한 뒤 1678년 윤창형 목사가 동해소를 철거, 이곳에 이설했다.

성의 둘레는 335자이고 높이는 12자이다. 돌섬인 여() 위에 세워졌는데, 3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 면이 육지와 통했다. 성문은 동문 하나이며 문 위에 초루가 있고, 객사 3칸과 군기고 3칸이 있었다.

1870년 편찬된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대정군군병도안에 의하면 모슬진 소속의 방군으로 서기·인기수·사후·행고수·우구배·갑주배·교위배·장막배·수종·나팔·화병·수리색·군기색·방포수·궁궤직·전궤직 각 1, 치총·훈도·객사직·문직·영기수·문서직·순시기수·금고기수 각 2, 서기 5, 치보군 31명 등 69명이 배치됐다.

모슬포 항만 안에 있었던 모슬포수전소에는 판옥전선 1, 선장 1, 사격 등 모두 104명이 배치됐다.

1510년 장림 목사는 가래방호소(현 강정동)를 동해방호소(회수동 지역)로 옮겨 돌로 축조한 성 안에 객사와 군기창고 등을 시설했고 조방장 1인 치총 2인 등 각종 요원을 배치했다. 당시 둘레 500, 높이 8척이었던 성은 일제이후 축항공사로 허물어져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다.

선조대에는 동해방호소 둘레가 280, 높이 8, 서쪽과 남쪽에 허물어진 두 개의 문이 남아 있어 성윤문 목사가 이를 개축했다.

1675년 어사 이선의 계청에 따라 1678(숙종 4) 목사 이창형이 동해방호소를 철거하고 모슬진(옛 수전소 자리)으로 이전 설치했다.

제주목사 이원조가 펴낸 탐라지초본(1843)에 의하면 돌섬 위에 있는 성은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고 1면이 육지와 통하며, 성안에는 샘이 없어 성 밖 동쪽으로 50보 되는 거리에 령신수라는 큰 샘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탐라순력도의 모슬점부.

이형상의 남환박물 지봉(誌烽) 항목에는 제주 4면을 돌아가며 설치된 봉수와 연대가 63군데나 되는데, 여기에는 별장, 망한, 봉군 등을 두어서 주야로 번갈아가며 지키고 동서로 서로 연락하여 영문(제주영)에 도달케 한다. 만일 안개, 구름, , 바람 등으로 인하여 봉화로써 신호가 통할 수 없을 때에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에까지 달려가서 알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의 책 지관방(誌關防) 항목에는 사방 둘레에 칼날 같은 돌들이 꼿꼿이 서 있어 갯가에는 배를 댈 수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 왜선이 침범하여 노략질하였으나 한 번도 이득을 얻은 적이 없었다. 그 뒤 화북, 조천, 어등(魚登:행원), 애월, 명월 등지의 포구에는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암초가 많아서 사용하기가 어려워 지금은 모두 훼파(毁破)되고 오직 9진에만 육군을 모아 조직하였다. 또한 봉화를 두 번 올리면 속오군병이 각기 모여 대기하고 세 번 올리면 수첩군이 성에 오르며, 네 번 올리면 화약을 장진하고 다섯 번 올리면 접전을 하였다. 이것은 예로부터 정해져 내려오는 약속인 것이다. 더욱이 황당선이 표도하였다고 하더라도 문정(問情)을 마치기 전에는 거의 다 이와 같이 하며 혹 연습을 하고자 할 때에는 야반에 장대에서 각을 불면 주성 내의 남녀노소가 무기를 들고 성에 오르는데 조금도 지체함이 없어서 방어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정현 관내에는 5개 봉수대와 9개의 연대가 있었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시설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그 위에 불을 피우는 화덕을 설치했다. 봉수는 대체로 제주해안을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오름에 설치됐다.

연대는 선박이 접안하기에 용이한 해변지역에 주로 위치했다. 그 규모는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높이와 너비가 10척 내외이며 돌로 쌓았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세종 때 비로소 축조된 것으로 나와 있다.

봉수대에는 별장 6명과 봉군 12-36, 연대에는 별장 6인과 직군 12명이 배치되었다. 대정현 소속 5개의 봉수로는 굴산봉, 이두봉, 모슬봉, 저별봉(송악산), 당산봉이 있었으며, 7개 연대는 변수(강정), 대포, 당포(예래), 산방, 무수(하모), 서림(일과), 우두(용수)에 위치했다.

현 대정읍 관내에는 모슬봉수와 저별봉수와 무수연대와 서림연대가 있다. 그중 모슬연대와 저별(貯別)봉수 그리고 서림연대를 소개한다.

모슬봉수는 대정읍 모슬봉 정상 해발 180m 지점에 있었다. 현재 공군 레이더기지로 사용되고 있는 봉덕 자리는 확인할 수 없다. 저별봉수는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서쪽 옛 분화구 능선 해발 80m 지점에 있었다. 봉덕 자리에는 돌로 축석하였던 자취가 남아있다.

제주도기념물 제23-22호로 지정된 서림연대는 모슬진소속으로 일과리 해안변에 있다. 이 연대는 1977년 보수했는데 북쪽으로는 우두연대(12), 남쪽으로는 무수연대(3)와 교신했다. 별장 6인 봉군 12명이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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