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왕에서 죄인으로’ 드라마틱한 삶 제주에서 끝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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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 유배길-광해군(上)...개혁 군주에서 폐륜 군주 낙인
광해군, 1637년 제주에 유배...위리안치 4년 만에 생 마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해군 묘(왼쪽)와 부인 유씨의 묘(오른쪽). 문화재청 제공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해군 묘(왼쪽)와 부인 유씨의 묘(오른쪽). 문화재청 제공

제주의 역사·문화를 알려면 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제주를 뒤흔든 사건과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는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난다. 본지는 인생행로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길에서 제주의 진면목을 살펴보는 기획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제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왕통을 계승할 적자가 아니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선조는 국난에 대비해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조정을 둘로 나눴다. 선조의 원조정(元朝廷)은 의주로 향했고, 분조(分朝·임시 조정)를 이끈 17세의 광해군은 병사를 진두지휘하며, 민심을 수습해 전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1608년 광해군은 왕위에 올라 자신을 지지해준 대북파와 함께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 대신 쌀로 바치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 백성들의 공납 부담을 덜어줬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해 백성들이 주위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했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로 평화와 실리를 챙겼다. 만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후금은 중원으로 진출해 명과 조선을 압박했다.

1618년 후금과 대척했던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군사 1만명을 파병했지만 때를 보아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려 후금과의 전면전을 피했다.

선정이 있는 반면, 실책도 있었다. 신하들의 언로는 차단됐고, 직언을 하면 제거됐다. 뇌물정치가 판을 쳤고, 매관매직이 성행해 돈만 있으면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했던 이복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를 일으킨 패륜 군주로 낙인찍힌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1637년 광해군이 제주도에 첫 도착한 어등포(구좌읍 행원포구)에 설치된 표지석.
1637년 광해군이 제주도에 첫 도착한 어등포(구좌읍 행원포구)에 설치된 표지석.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은 이곳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배에 탔지만 자신이 가는 곳을 몰랐다.

배 위에는 4면에 휘장을 둘러 밖을 보지 못하게 했다. 목적지를 알려주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호송관(별장)들은 광해군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을 실은 배는 어등포(구좌읍 행원포구)에 도착했다.

“이제, 제주도에 왔다”고 하자, 광해군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며 탄식했다. 제주에 온 유배인 중 왕족은 있었지만 왕은 광해군이 유일했다.

유배길은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에서 시작된다. 이어 노씨부인 대비공원~명도암~화북포구~관덕정~광해군 적거터로 이어진다.

광해군은 제주에서 위리안치(가시덤불로 사방을 막는 형벌)에 처해져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았다.

밖으로 출입을 못 하도록 방문을 막고 자물쇠를 봉했다. 속오군(지방군) 30명이 교대로 광해군의 처소를 지켰다. 제주시는 2007년 고증을 거쳐 중앙로 82번지 KB국민은행 제주지점 앞 적거터에 머릿돌을 세웠다.

그는 나인(궁비)이 ‘영감’이라고 놀리며 질책을 해도 한마디 말도 않고 처연하게 지냈다. 이 모습에 본 백성들은 나인의 패악하고 교만한 행태에 분개했다.

제주시 중앙로 KB국민은행 제주지점에 세워진 광해군 적소터 머릿돌.
제주시 중앙로 KB국민은행 제주지점에 세워진 광해군 적소터 머릿돌.

만인지상에서 죄인이 된 그는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음력 7월 1일 67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국의 왕으로는 쓸쓸한 최후였지만 4번째로 장수한 임금이었다. 이시방 제주목사는 시신이 썩을까봐 조정에 알리기도 전에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염을 해줬다.

인조는 7일간 소찬으로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초상을 치르도록 했다. 예조참의가 제주에 도착한 7월 27일. 왕이 승하하면 지내는 대제가 제주목 관덕정에서 거행됐다. 제주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왕실의 예례가 펼쳐졌다.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김씨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적성동에 묻혔다.

양진건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장은 “광해군의 유배를 계기로 제주도민들은 왕실의 예절과 생활양식을 보게 됐고, 조정의 고관들이 왕래해 제주의 사정을 엿보고 실정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며 “관덕정에서 거행됐던 대제를 재현하면 관광·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성 내 광해군이 유배한 곳.
제주성 내 광해군이 유배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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