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봉 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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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칼럼니스트

컴퓨터로 원고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인터넷엔 많이 익숙해졌다. 서재에 컴퓨터가 있어서 아들, 딸이 컴퓨터를 하는 걸 보고 어깨 너머로 익혔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도 웬만큼 챙길 줄 안다.

그렇게 해서 가입한 것이 인터넷 카페의 수필 동호회다. 물론 수필가가 모인 동우회는 아니지만, 글쓰기 좋아하는 40대 이상이 회원 가입 조건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워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쉽게 글을 올릴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한동안 다른 회원의 글을 읽기만 했더니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워드 실력이 독수리타법이라고 실토하기도 싫고, 남의 글만 주워 읽는 식객 노릇도 한계가 있다.

좋은 묘안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상에서 유머는 청량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도 릴레이식으로 다른 회원이 바턴을 이어받게 하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모아둔 유머도 많고 형편에 따라 적당한 양의 글을 올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해서 신설한 것이 ‘유머릴레이’다. 생각은 적중해서 바통을 이어받는 사람이 나타나고, 꽤 좋은 유머도 읽었다.

제주 수필가들의 동인지를 읽다가 꽤 재미있는 예화 하나를 얻었다.

‘언제 죽을 것인가’라는 모 수필가의 글에서였다.

예화인 ‘미개봉 반납’이 유머로서 가치가 충분했다. 컴퓨터의 해당 사이트를 열고 글쓰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제목을 치고 난 다음에 마우스 조작을 어떻게 했는지 바로 글이 등록돼버렸다. 삭제를 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당황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삭제키를 한번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알아야 면장을 하지. 내용이 하나도 없었으니 진짜 미개봉 반납이었다. 다시 답 글 형태로 내용을 올렸다.

죽었을 때 묘비명은 어떻게 쓸 것이냐는 문제도 관심사 중의 하나다. 한 노파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순결을 지켰고,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 노파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장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묘비명을 ‘처녀로 태어나 처녀로 살다가 처녀로 죽었노라’고 해달라고 의뢰했다. 그 후 노파는 돌아갔고 장의사는 비석 만드는 사람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 석공은 너무 게을러서 약속 날짜가 다 돼서야 다급한 나머지 묘비명이 쓸데없이 길다고 생각하여 같은 뜻인 짧은 다섯 글자로 대신했다. ‘미개봉 반납.’

답글 형태로 올린 것보다 백지 상태인 원 글만 조회한 회원이 다섯 사람이나 더 많았다. 백지 상태인 모니터를 보고 싱거운 사람, 아니면 내용을 개봉 안하고 반납하는 것으로 이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 만에 20여 회원이 조회를 했다. 총회원이 30명이다. 답글을 올린 포항 여자 회원의 닉네임은 ‘사랑니’다. 답 글의 제목이 “미개봉 반납 넘넘 우스버라”였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중에 ‘록키’라는 영화가 있다. 권투 선수인 록키는 타이틀 매치에서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을 만큼 얻어맞는다. 심판이 더 계속하겠느냐고 묻는 말에 “깨지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투혼을 불태웠고, 결국은 챔피언 벨트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눈두덩이 시커멓게 이르면서 록키는 이겨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쉽게 포기하는, 미개봉 반납은 쉽게 사는 일은 될지언정 사는 맛을 모를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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