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해방 후 창궐한 콜레라…방역 위해 중역 맡아
(168) 해방 후 창궐한 콜레라…방역 위해 중역 맡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박승규, 한약업에 종사…1880년 생원시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
 박열선, 1908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받아…도내 교회 첫 집사
 박영순, 일제강점기, 야학 항일 활동…독립유공 건국포장 받아
 박영훈, 1961년 제주도립병원장 취임…공중보건에 남다른 관심
 박용후, 1만 3000자 제주 방언 체계화…제주도문화상 수상해
제주도립병원 본관 건물로 현재는 여러 차례 증·개축 해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도립병원 터에는 현재 제주대창업보육센터가 설치돼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박영훈은 1961년 제주도립병원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도립병원 본관 건물로 현재는 여러 차례 증·개축 해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도립병원 터에는 현재 제주대창업보육센터가 설치돼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박영훈은 1961년 제주도립병원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박승규朴昇奎:생몰년 미상, 선비, 의약(醫藥)업에 종사, 자 원오(元五).

제주시 화북동 ‘벨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나 흔히 박진사(朴進士)라고 불렸다. 후일 주거지를 ‘제주-성안’으로 옮겨 한약(漢藥)업에 종사했다. 1880년(고종17) 생원시에서 수석으로 합격, 이때 이호동의 김병윤(金炳胤)도 함께 합격했다.

▲박열선朴烈先:생몰년 미상, 도내(島內) 기독교 교회 첫 집사(執事), 본관은 밀양.

애월읍 봉성리 ‘도노미’ 태생이다. 남편 이덕련(李德連)은 12년 동안 금성리 ‘모실-개’ 구장(區長)을 하면서 양(梁)석봉의 집에서 회집해 예배를 했다.

그는 본도 최초의 기독교 신자로서 1908년 이기풍(李基豊) 목사에 의해 처음 세례를 받았다. 1911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신민회사건으로 본도 조천리에 유배왔을 때 이덕련은 남강과 교분을 가져 첫아들 이도종(李道宗)을 평양의 숭실(崇實)전문학교로, 또 차남 이의종은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진학시킬 수 있었다.

오산(五山)학교는 남강(南岡)이 세운 민족주의 교육장으로 알려진 명문학교였다. 1919년 3·1운동이 거족적으로 번지니 의협심이 강한 그는 일제당국으로부터 주목받더니 일경(日警)에 체포된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맏형 이도종(李道宗)은 숭실학교를 나와 본도 제1호 목사가 됐다. 1948년 4·3사건 와중에 설교하고 돌아오면서 재산(在山) 게릴라를 만나 사망했다.

▲박영순朴榮淳:1916(일제강점기)~1947(미군정기), 본관 밀양, 야학에서의 항일 활동.

일제강점기 강문일, 김홍규와 함께 동년 8월 23일 기소돼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까지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사립 단국(檀國)중학교 교사로 재임, 1947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애월읍 하귀리 ‘귀일’에서 박한준(朴漢俊)의 장남으로 산북 애월읍 하귀리 1734번지에서 태어나 1926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금구(金甌)소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귀향해 동년 8월 하귀리 2구(區)에서 강문일(康文一) 등과 함께 향리에 야학을 설치해 운영했다.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하귀리 1구에서 김홍규(金弘奎), 김을봉(金乙鳳)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시켰다. 이천만가(二千萬歌)·혁명가·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했다.

▲박영훈朴永勳:1912(일제강점기)~1966, 의사, 초대 제주도 보건후생국장, 제주도립병원장, 본관 밀양,

제주시 일도동 ‘제주-성안’에서 청암(晴岩) 박종실(朴宗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朴景勳)의 아우, 전 대통령권한대행 박충훈(朴忠勳)의 형이다.

1931년 경성제일고보 졸업, 1937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전 과정을 마쳐 전문의로서 실력을 쌓기 위해 동 대학 부속의원 외과교실에서 2년 7개월 동안 연구 업적을 길렀다.

1963년 모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5년 10개월 동안 더 연구하고 수련한 후 귀향, 제주시 삼도동 95번지에서 박외과의원을 개업했다.

해방이 돼 1946년 8월 제주가 처음으로 도제(道制)를 실시하게 되자 초대 도지사 박경훈 밑에 있는 보건위생국장으로 기용됐다. 이 해의 여름은 병술년(丙戌年) 호열자가 창궐해 그가 아니면 이를 해결할 수 없어 친형이 도지사로 있는데도 이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관직을 그만두고 개업의로 재출발해 오창흔(吳昶昕·오조), 문종후(文鍾厚·삼도) 등과 더불어 1948년 제주도의사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에 오창흔을 추대하고 그는 1949년부터 10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면서 회원들의 문제를 잘 보살폈다.

1961년 제주도립병원장으로 다시 공직에 몸을 담아 힘을 쏟고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 제주도위생시험소장 등을 겸임해 공중보건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박용후朴用厚:1909(융희3)~1993, 교육자, 향토사 연구가, 중등 교장, 저서(著書) 다수 남김, 홍조소성훈장 수훈, 송계(松溪), 본관 밀양,

대정읍 하모리 ‘모실-개’에서 박인식(朴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대정공립보통학교를 3년, 광선의숙(光鮮義塾)에서 2년을 더 공부하고, 이 학교에서 교사 강규언(姜圭彦)의 민족주의 정신에 크게 매료돼 영향을 받았다.

더욱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서 1년 배우고 귀향해 광선의숙 교사를 역임하고 독학으로 교사 검정시험에 합격해 초등교육에 종사했다.

해방 후 중등교육에 투신, 중문중, 대정중, 안덕중, 무릉중, 신창중, 대정고의 교장을 역임했다. 제주외솔회 부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향토사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대정군지’, ‘남제주군지’, ‘제주도지(濟州島誌)’, ‘대정읍 약사’, ‘국역 남사록’, ‘최남단 모슬포’, ‘제주도 옛 땅이름 연구’, ‘제주도방언연구(자료편)’, ‘제주도방언연구(고찰편)’ 등이 있다.

방언 연구는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연구물이다. 이는 고대(高大)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됐다.

또 한적인 남명소승(南溟小乘)·남사록(南槎錄)·탁라국서(羅國書) 등을 국역했다. 1960년 11월 3일에 10여 년간 수집한 1만 3000자의 방언을 문법적으로 체계화해 ‘제주방언집’을 출간, 이런 노력으로 1976년 12월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박용후 송덕비.
박용후 송덕비.

‘제주도 유맥 6백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양중해)는 그를 기려 보성초등학교 입구에 ‘松溪 朴用厚선생 송덕비’를 세웠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