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상을 움직인 대정치가 제주에 유배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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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안유배길-송시열, 장희빈이 낳은 아들, 세자 책봉 반대했다가 83세에 유배
화북포구로 입도…칠성로 적거지에서 생강 심으며 위안삼아
추사 김정희 적거지 방문해 시 남겨…유생들 유허비 세워 기려
제주시 칠성로 전경. 사진 왼쪽 건물이 332년 전 유배를 온 송시열이 살았던 적거지로, 그는 이곳 빈 땅에 생강을 심으며 마음을 달랬다.
제주시 칠성로 전경. 사진 왼쪽 건물이 332년 전 유배를 온 송시열이 살았던 적거지로, 그는 이곳 빈 땅에 생강을 심으며 마음을 달랬다.

조선 후기는 ‘송시열의 나라’였다. 송시열(1607~1689)은 성리학의 대가이자 집권 여당인 서인 노론(老論)의 영수로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공자와 주자를 잇는 송자(宋子)로 추앙받았다.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가 붙은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됐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됐다. 당시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됐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 태어났다.

그는 27세였던 1633년(인조 11)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해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그는 이 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1635년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됐다.

약 1년간에 걸친 사부 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생활을 접고 고향인 충북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했다.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직접 독대했다. 효종과 현종에게 중용돼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오른 그는 정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지난해 10월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기리는 숭모제가 고향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열렸다. 사진=옥천군 제공
지난해 10월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기리는 숭모제가 고향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열렸다. 사진=옥천군 제공

1689년 숙종이 28세 나이에 장희빈에게서 아들(훗날 경종)을 얻었다. 아들이 없었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은 백일도 안 된 후궁의 아들을 무리하게 왕의 적장자인 원자(元子)로 책봉했다.

이 문제를 놓고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 결국 83세의 고령에 제주도로 유배됐다.

그는 아들 송기태와 형제, 손자, 조카, 노복과 함께 전북 정읍에서 출발해 강진을 거쳐 제주로 향했다.

일행은 전남 보길도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잠시 바람이 잦기를 기다렸다.

그는 잠시 머문 보길도 백도리 암벽에 ‘여든 셋에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구나. 말 한마디가 어찌 큰 죄인일까 마는 세 번이나 내쫓기니 궁하다 하겠네’라는 내용을 새겼다.

바람이 잦아들자 그의 일행은 돛을 올려 제주도 별도포(화북포구)에 도착, 제주목 성안 산지골에 사는 고을 아전 김환심의 집을 적거지로 정했다.

그는 제주향교에서 주자대전강목, 역학계몽 등을 빌려다 매일 손자와 함께 읽거나 뜰을 산책하면서 만년에 애상 젖은 세월을 보냈다.

그의 유배기간은 비록 100여 일 밖에 안됐지만, 송시열의 유배 자체가 제주유생들에게는 큰 화제가 됐다.

송시열은 정계 복귀 대신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1689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해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송시열 초상(국보 239호).
노년의 송시열 초상(국보 239호).

1694년 폐비민씨(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으면서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났다.

숙종은 오만불손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거듭 일으킨 장희빈에 질린 나머지 인현왕후에게 마음이 돌아섰다.

이로 인해 송시열이 복권되자, 제주유생 김성우가 상소해 귤림서원에 그를 배향했다. 당시 유배 중이던 김춘택이 상소문을 써 준 것도 큰 힘이 됐다.

1772년(영조 48) 송시열의 적거지인 제주시 칠성로길 37(일도1동)에는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가 세워졌다.

송시열의 유언을 받든 수제자 권상하의 증손자인 권진응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771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유배됐다.

그는 창천리에 있는 적거지를 ‘창주정사(倉洲精舍)’라 부르며 제주유생들을 가르쳤다.

권진응은 이듬해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 제주시 칠성로 있는 송시열의 유배지를 방문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유배됐던 집은 1724년 불이 나서 폐허가 돼 버렸다.

이에 권진응은 “송시열 선생은 성덕과 대업을 이루신 분인데, 아직 백 년도 되지 않아 그 유적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됐으니 선비들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라며 한탄했다. 권진응은 제주유생들과 협의하고 제주목사 양세현의 도움을 받아 비를 세웠다.

이 비는 1935년에 제주향교로 옮겨졌다가 제주중학교를 정비하면서 오현단으로 이전됐다.

대정읍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는 제주목에 나갔다가 칠성로 있는 송시열의 유배지를 찾은 후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최익현은 시와 편지, 상소문에 송시열을 자주 거론했다.

송시열과 제주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오현단에는 유허비와 ‘증주병립(增朱壁立)’이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오현단 암벽에 새겨진 ‘증주병립(增朱壁立)’은 중국의 대학자인 증자와 주자가 쌍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운다’는 뜻으로 송시열의 글씨다.

332년 전 송시열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산책을 하며 빈 땅에 생강을 심었던 칠성로는 탐라시대 칠성단에서 유래됐다.

일제시대 ‘칠성통’은 제주 최대 상권으로 미즈하(水羽)시계점과 모리(森)시계점이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도 귀금속·시계류 전문판매점이 들어섰다.

1950년대에는 다방과 양장점이 전성기를 누렸다. 6·25전쟁으로 피난을 온 계용묵 선생 등 문인들은 칠성로 동백다방에서 작품을 발표하면서 제주 문학의 꽃을 피웠다.

의류점과 액사세리점 등 165곳의 상점이 밀집해 제주의 명동, 패션 1번지로 불렸던 칠성로는 원도심으로 쇠퇴했지만, 산지천과 탐라문화광장, 제주목 관아를 연결하는 문화·관광·쇼핑이 접목된 로데오 거리(체험관광 거리)로 부활했다.

제주시 오현단에 있는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제주시 오현단에 있는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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