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시대를 앞서간 거상…제주 경제를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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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생, 항일 조직 ‘성진회’ 창립
 박재하, 광주에서 만세운동 주도
 박종실, 제주도서관 건립 후 기증
 박종훈, 제주검찰청 검사장 재임
제주잡화상동업조합 창립 기념 사진. 청암 박종실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제주잡화상동업조합은 1950년대 제주공업협회, 제주도직물협회, 제주도공예협회 등과 더불어 제주상공회의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잡화상동업조합 창립 기념 사진. 청암 박종실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제주잡화상동업조합은 1950년대 제주공업협회, 제주도직물협회, 제주도공예협회 등과 더불어 제주상공회의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박인생朴仁生:1903(광무7)~1929(일제강점기), 광주농업학교 성진회(醒進會) 항일 활동, 2005년 대통령표창, 일명 박인성(朴仁性), 본관 밀양.

아버지 박종신(朴宗信)과 어머니 이학(李鶴)의 아들로 표선면 성읍리 ‘정의-골’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때부터 수재로 알려졌으며 당시 교사 김문준(金文準)의 영향을 받아 국권 회복 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제주도 유일의 중등학교인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해 1924년 수석으로 졸업, 동년 4월 광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학했다. 이듬해 최종 학년에 진급하면서 학업 성적은 수석, 학생자치회의 간부이며 달변가(達辯家)로 알려졌다.

1928년 3월 학교를 졸업,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항일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의 창립 멤버로 가입했다. 당시 광주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 학생 7명과 광주농업학교 박인생(朴仁生) 등 6명이 조국의 독립을 목표로 조직했다. 초창기 총무는 왕재일(王在一), 서기 박인생, 회계 장재성(張載性)이었다.

박인생은 도쿄의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에 입학해 민족 해방 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박인생은 1928년 일본에서 투쟁하는 김문준(金文準·조천)과 만나게 된다. 김문준은 그의 정의보통학교 시절 은사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김문준과 장재정과의 만남을 주선하던 중 1929년 봄 도쿄(東京)경시청의 형사에게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 일로 반신불수가 돼 귀향, 1929년 5월 12일 이승을 떠났다.

조국이 광복되고 그와 함께 활동한 성진회 회원 중 왕재일(王在一·구례), 최규창(崔圭昌·영암), 문승수(文升洙·완도) 등은 정부에서 수여하는 독립유공 애국장을 받았다.

▲박재하朴宰夏:1884(고종21)~1933(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기미독립운동 당시 광주에서 항일 활동, 본관 밀양.

제주시 일도리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전남 광주로 건너가 광주군 광주면 북문동에서 살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신발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1919년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년 3월 10일 전남 광주에서는 최한영(崔漢泳) 등 기독교인과 사립숭일학교·사립 수피아(須彼亞)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 등 5000여 명이 시내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일제는 시위 군중 가운데 주동자 76명을 체포, 기소했는데 그 가운데 제주 출신은 박재하와 수피아여학교 학생 고연홍(高蓮紅) 등 두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법이 조선형사령을 적용하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광주에서 양화(洋靴)제조업으로 모은 재력의 일부를 기독교 전도비(傳道費)로 희사했다.

▲박종실朴宗實:1885(고종22)~1966, 사업가. 장남은 초대 제주도지사, 차남은 도립 제주의원장, 3남은 동양방송사장, 4남은 대통령 권한대행, 외동딸은 주미(駐美)공사 고광림(高光林)의 부인, 호 청암(晴岩), 본관 밀양.

사망하자 본도 초유의 사회장(社會葬)으로 그를 기렸다.

제주시 이도동 ‘제주-성안’에서 박원길(朴元吉)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부자라면 북쪽에는 박종실, 남쪽에는 강성익(康性益)을 지목했다.

1910년 25세의 박종실은 나라가 망하자 백성의 살길은 오직 모두 부지런히 상술을 익혀 경제적인 자립을 하는 것만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1910년대의 사회 분위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위계사회에서 가장 천하게 멸시받던 상술에 착안해 부를 향유했다. 실용주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대성한 후 그 일부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훌륭한 선각자이다. 박종실상점이나 기업에서 점원 혹은 사원을 거쳤던 인사들이 후일 자수성가한 점은 그의 상술과 인격에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박종실은 1910년 박종실상점을 제주성안 칠성로에 개점했다. 잡화, 견면포(絹綿布), 철물류(鐵物類) 등을 취급해 이재에 성공했다.

1922년 제주축항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동년 8월에 제주상선주식회사를 설립해 감사역을 맡았다. 또 1925년 제주전매서 개설에 참여하고 강성익, 최윤순(崔允淳)과 함께 제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해 감사역에 취임했다. 1931년에는 밀가루·설탕·소주 등을 취급하는 제주상사조합을 설립, 조합장에 취임하고 1935년 제주상사를 삼일해운주식회사로 개편해 사장이 됐다. 제주상사조합도 제주상사주식회사로 개편했다.

동년 5월에 제주읍회(邑會) 의원에 당선되고 제주상공회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39년 삼일해운을 제주상운주식회사로 개편, 사장에 취임하고 1940년 제주도생활필수품상업조합을 설립해 조합장에 취임했다.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 1945년 4월 일제에 의해 소개령이 내려지자 전남 나주로 소개, 해방이 되자 일가족 모두 제주로 귀환, 1946년 제주도석유배급조합을 설립, 조합장이 되고 1949년 제주적십자사 지사장에 취임했다.

1952년 제주미유(美油)주식회사를 남창(南昌)석유주식회사로 개편, 1957년 제주시 삼도1동 234-25번지의 부지 310평에 건평 1173평의 제주도서관을 건립해 제주도에 기증하니 이 공로로 문교부장관과 대한교육연합회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1965년 경로당 청암정(晴岩亭)을 건립해 제주시에 기증한 바 있다.

1966년 6월 13일 밤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업적을 기렸다.

▲박종훈朴鍾壎:1893(고종30)~?(분단시대), 법조인,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변호사, 광복 후에 제주지법 검사장,

제주시 이도동 ‘과양’ 서광양에서 태어났다.

1913년 3월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제3회로 졸업하고 관립 경성법률전수학교(서울법대 전신)에 들어가 이를 마쳤다. 1920년 제주도 서기, 또 도속(島屬)으로 2년 재임하고, 1921년 판·검사 특별임용 시험에 합격, 1923년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서기로 출발한 뒤 사회 활동에도 참여해 제주청년수양회에 가입했다. 또 제주금주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에 힘썼다.

1927년 2월 부산지법 진주지청 검사, 1928년 10월 공주지법 대전지청 판사, 1930년 12월 광주지법 장흥지청 판사, 1932년 10월 공주지법 강경지청 판사, 1934년 7월 대구지법 상주지청 판사 등을 거쳐 1936년 7월에 퇴임했다.

1939년 제주시 이도동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해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등록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돼 동년 10월 10일 군정청 법무국장 ‘우달’ 소좌와 함께 법무국의 김영희(金永羲가 내도했다. 제주도는 8만 일본군이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되고 일본감독관 센다-젠페이(千田專平)를 비롯해 행정기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도사(島司)와 변호사, 유림(儒林), 건준(建準) 등과도 회견하고 변호사 최원순(崔元淳), 양홍기(梁洪基), 박종훈(朴鍾壎) 등 3명에게 지방법원 사무를 임시로 위촉해 도내의 치안을 맡게 했다. 1945년 10월 11일 미 군정청에 의해 제주지방법원 판사 겸 법원장에 최원순, 검사장 양홍기, 검사 박종훈 등이 임명됐다.

1947년 제주지검 검사장으로 부임해 1년 동안 재임했다. 그후 변호사 개업을 하고 또 제주자동차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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