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받던 울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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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보성초·일제 신사 터
옛 대정현 객사 있던 보성초…동계 정온 비 등 비석 전시돼
일제 황민화 정책 일환으로 읍면 지방에 제주신사 등 건립
민족주의자·성내교회·금성교회 중심으로 참배 거부 운동 
일제강점기 제주신사 전경. 일제 당국은 신사를 읍면 지방에까지 확대하려 제주시 북수구 문루였던 공신정을 헐고 제주신사를 세웠다. 현재는 이 자리에 제주지방기상청이 들어서 있다.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일제강점기 제주신사 전경. 일제 당국은 신사를 읍면 지방에까지 확대하려 제주시 북수구 문루였던 공신정을 헐고 제주신사를 세웠다. 현재는 이 자리에 제주지방기상청이 들어서 있다.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지금의 보성초등학교는 옛 대정현의 객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보성초등학교에는 비석거리가 있으며, 이곳에는 재일동포 등의 선행을 적은 20여 기의 비석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가장 오래된 비로 백희수 목사선정비와 동계 정온의 비가 있다.

▲산남 최초 사립학교인 보성초등학교

목사 백희수는 전임자가 경질돼 제주를 떠난 것에 비해, 2년 6개월 임기를 다 채우고 제주를 떠났다. 비 좌우면에 일과(日課)영락(永樂)이라 음각된 것으로 보아, 두 마을에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원조 목사가 세운 동계 정온의 비는 처음에는 정온의 유배지인 막은골에 있다가 안성리 절동산 등 여러 곳에 유랑하다가 지금의 위치로 1977년 옮겨졌다. 다음은 동계 정온과 백희수 목사 비에 대한 안내판의 내용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에 있는 ‘동계 정온 선생 유허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에 있는 ‘동계 정온 선생 유허비’.

‘동계 정온 선생 유허비(桐溪 鄭蘊 先生 遺墟碑): 이 비는 1842년(현종 8)에 추사 김정희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원조가 동계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온의 유배지인 막은골에 세운 것이다. 이후 대정현성 동문 밖으로 옮겼다가 1963년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으며, 19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동계 정온은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을 처형하게 한 강화부사 정황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1614년 (광해군 6)에 제주로 유배되었으나, 1636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정온은 유배생활 중에 덕변록(德辯錄), 망백운가(望白雲歌), 망북두시(望北斗詩) 등을 지었다. 그는 김정, 송시열, 김상헌, 송인수와 함께 제주 교학 발전에 공헌을 한 제주오현 중의 한 분이다. 1668년(현종9)에 오현단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사상백공희수거사비(使相白公希洙去思碑): 이 비는 조선후기 제주목사를 지낸 백희수의 선정을 기리는 비이다. 백희수 목사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철종 2년(1851년) 7월부터 1853년 12월까지 2년 6개월간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다. 당시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6개월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목사가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떠난 것에 비춰볼 때 백희수의 공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업적으로는 귤림서원을 개건하였으며 부임 첫해에 조정으로부터 별저미(別儲米)와 내탕전(內帑錢) 1,000냥을 특별히 지원받아 흉년으로 생긴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었다. 1852년에는 유생 강기석의 건의에 따라 제주성 남수구 북쪽 김정의 적거지에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스스로 지었다. 또한 같은 해 가을 정의현 순행길에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낡은 것을 보고 정의현감에게 수리하도록 하였으며, 12월에는 중국상선이 대정현 범천포(현 화순포) 앞바다에 표도한 것을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백희수 목사의 선정비는 이곳 외에도 화북비석거리(도기념물 제30호)의 목사백공희수휼민선정비(1854년 건립), 조천비석거리(제주도 기념물 제31호)의 사상백공희수청덕선정비(1856년 건립), 제주목 관아(사적 제380호)의 사상백공희수휼민선정비(제주도 향토유형유산 12-4호, 1857년 건립)가 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신사참배

일제는 1937년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인에 대한 신사(일본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참배를 비롯한 황민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일제는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을 강요하려, 1910년 이후 서울 남산에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데라츠 오미카미(천조대신)와 한국을 강제로 병합시킨 일왕 메이지 덴노라 명치천황을 안치한 조선신궁을 세웠다.(해방후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신사참배를 의무화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어 우리나라 도처의 요지에 신사를 세워나갔다. 

제주시에서는 1565년 동성을 쌓으며 설치한 북수구 문루였던 공신정을 1935년 헐어내고, 그 자리(지금의 제주기상청 자리)에 제주신사를 건립했다. 일제 당국은 신사를 읍면 지방에까지 확대하려, 1939년 초 면소재지에 일본의 개국신주를 모신 신명신사의 건립을, 당시 도사 스즈키와 친일인사 93명이 조선총독부에 출원하는 형식으로 허가받게 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구좌면 세화리에 전○홍 외 16명, 동면 김녕리에 전○홍 외 10명, 대정면 모슬포에 축○무 외 37명, 성산면 성산포에 김○보 외 19명, 조천면 조천리에 김○희 외 21명, 중문면 중문리에 이○백 외 29명, 애월면 애월리에 김○준 외 22명, 한림읍 한림리에 김○우 외 13명, 서귀면 서귀리에 김○익 외 24명, 표선면 표선리에 송○석 외 10명이 출원해 신사를 창건하게 했다. 구좌면에는 두 곳에 설립됐고, 추자면 대서리에 신사를 세울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조국이 해방되자 제주선인들은 신사들을 부수는 일부터 했다. 파괴된 신사 안에는 소위 신기삼종인 거울, 칼, 구슬 등이 있었으며, 이 물건에 참배하도록 강요한 것에 분통과 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신사건립을 출원한 사람으로 모든 지역의 면장을 앞세운 일제는, 주민 스스로 세운다는 명분을 내보이며 자신들의 흉계를 감추려 했다. 이에 반발해 민족주의자와 기독교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평안도 지역에서부터 일어나는데, 제주도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 제주성내교회, 애월면 금성교회 신도들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애월리 신사 터에는 민족주의자 장응선의 주도로 중학교를 지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었고, 한림리의 신사터에는 항일운동가 강문호에 의해 기독교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강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에 의한 식민지 교육 등으로 우리나라는 역사 문화를 수없이 파괴당했고 그 악영향은 지금까지도 정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도 하다.

신사가 있었던 장소로는, 대정에는 상모리 충혼묘지의 북쪽 구릉, 애월에는 애월중 옆 송림 사이, 한림은 한림교회 자리, 안덕은 안덕교  바로 북쪽, 서귀포는 정방동사무소 자리, 남원은 남원중 자리, 표선은 표선중 자리, 성산은 일출봉 서쪽 언덕, 구좌읍은 세화리 망동산과 김녕중 자리, 조천은 옛 면사무소 자리에 건립됐다. 

중문에 있었던 일본신사 터에는 광복 후 중문천주교회가 들어섰다. 중문천주교회는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에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천주교회 입구에는 당시 도움을 준 장교 2명의 공덕비가 세웍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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