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교육자 외길…전도 학교에 무궁화 보급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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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중환, 효자 박계곤의 손자로 남행부장·훈련원 판관 벼슬 제수
 박중흠, 제주농고 교장·북제주교육장 등 역임…국민훈장 받아
 박찬규, 항일 운동가…제주 해녀 항일 운동으로 체포·옥고 치러
 박찬식, 조선일보 제주지국 기자…항일 운동 전위대 역할 앞장
1957년 찍은 신성여자고등학교 제3회 졸업사진. 최정숙 교장, 박중흠 교감 둥 교직원들이 학생들 앞에 앉아 있다. 제주공립농업중학교 교사로 있던 박중흠은 1956년 신성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57년 찍은 신성여자고등학교 제3회 졸업사진. 최정숙 교장, 박중흠 교감 등 교직원들이 학생들 앞에 앉아 있다. 제주공립농업중학교 교사로 있던 박중흠은 1956년 신성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박중환朴重煥:생몰년 미상, 무신, 남행부장(南行部長), 훈련원 판관 제수, 본관 밀양.

애월읍 신엄리 ‘엄쟁이’에서 효자 박계곤(朴繼崑)의 손자로 태어나 이도리 ‘제주 성안’에 서 살았다.

1794년(정조18) 4월 제주순무어사 심낙수(沈樂洙)가 내도해 효자 박계곤의 가문에 정표(㫌表)해 박씨삼정문(朴氏三㫌門)이라 칭하고 정려기(旌閭記)를 지어주면서 손자 중환에게 특별히 남행부장(南行部長)이란 벼슬을 제수했다.

박중환은 조부의 훈계를 지키며 병학(兵學)을 익히더니 1794년 1월에 전 주부(主簿)이던 그에게 훈련원 판관을 제수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박중흠朴重欽:1922(일제강점기)~1998, 교육자, 제주도교육연구원장, 북제주교육장, ‘제주교육사’ 완성, ‘탐라의 충효열忠孝烈’ 발간, 호 송암(松岩).

박봉희(朴奉禧)의 장남으로 애월리 ‘하-물’에서 태어났다. 조부 창암거사(菖岩居士)에 의해서 인격이 조성됐다.

여섯 살에 어머니가, 그후 스무 살에 아버지마저 타계, 송암은 방황할 환경에 처해졌다. 그러나 조부가 유명한 선비 형순공(亨淳公)이었다. 1936년 봄 손자를 일본으로 유학(留學)을보냈다.

전일본(全日本) 학생유도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실력이 보도된 바, ‘유도 마츠야마(松山)’는 그 명성이 널리 자자하게 됐다. ‘마츠-야마’는 송암의 일본식 성씨이다.

1942년 4월, 공립중학교 교유(敎諭) 자격증을 받았다. 1944년 4월 서귀포의 제주도공립농업실습학교 교유로 첫길을 밟게 되었다.

당시 교장은 일본인이고 교사로는 이기휴(李基休) 선생과 단 둘뿐이었다. 이때 제주도에는 갑종(甲種·5년제) 중학교로 제주공립농업학교만이 존재헀다.

조국은 광복되고 1946년 11월 제주공립농업중학교(6년제)와 인연을 맺어 10년간 재임하면서 오로지 덕장(德將)다운 풍모로 힘을 쏟았다.

송암은 1956년 사립 신성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4년 도 초대 교육감에 신성여중고교 교장 최정숙(崔貞淑)여사가 당선되자 송암을 제주도교육청 장학사로 기용했다.

이어 1969년 한림공고 교장을 거쳐 1974년 3월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영전됐다.

이 무렵 박(朴)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제농고(濟農高) 이설 사업을 완료하게 됐다. 1976년 8월 북제주교육청 교육장이 돼 무궁화 재배 시범학교로 귀덕국민학교를 지정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협조로 무궁화 40여 품종 3만여 본을 번식시켜 전도 학교에 보급시켰다.

아울러 ‘무궁화 사진 및 시화전(詩畵展)’을 개최, 나라 사랑 정신을 널리 알렸다.

1978년 제주도교육연구원장, 1980년 학무국장에 발탁한 바 있고, 이어 제주시교육장을 거쳐 1983년에 다시 제주농고의 교장으로 부임했다.

송암은 연(延) 17년간 ‘제농(濟農)’에 몸담았고 1988년 2월 29일 정년퇴임을 맞이헀다.

총동창회에서는 명예동창증(同窓證) 제1호를,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제458호)을 수여했다.

퇴임하고 만 10년이 되는 1998년 77세의 일기로 옛 제농구지(濟農舊址)의 자택에서 이승을 하직했다.

▲박찬규朴燦圭:1912(일제강점기)~?, 제주 청년동맹 및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 본관은 함양, 한학자 박우상(朴雨相)의 아들, 박찬식(朴燦式·1907~1983)의 아우.

제주시 이도동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형도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여한 바 있었다.

이들이 검거된 1929년 8월 이후 성내 지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32년 1월 구좌 일대에서 해녀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일경에 의해 비밀 결사 ‘혁우동맹’이 탄로나게 돼 전도에 걸쳐 강창보를 비롯한 청년운동가 1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때 그도 체포당했다. 관련자 4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1933년 6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찬식朴燦式:1907(융희1)~1983, 고려 공산청년회의 항일 활동. 본관은 함양, 한학자 박우상(朴雨相)의 아들로 박찬규(朴燦圭)의 친형.

제주 청년동맹 성내 지부의 핵심 구성원들은 거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박찬식은 항일 운동이 가열한 뒤에 조선일보 제주지국 기자로 바른 붓을 들었다.

제주시 이도리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9월경 서울 견지동 조선 과학연구소에서 고려 공산당 청년회원 한일청(韓一淸)의 권유로 고려 공청에 가입했다.

역시 해녀 항일 운동의 배후 인물로 유죄 판결을 받은 1925년 11월 23일 창립한 경성학생연맹의 창립 회원 2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주 출신으로 가입한 맹원은 박찬식, 김정로(金正魯·이호), 윤석원(尹錫沅·이도) 등이었다. 이 학생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를 표방해 항일 운동의 전위대 역할에 앞장섰다.

이들과 함께 조선의 교육 제도는 제국주의의 옹호이며 노예 교육을 강요하고 있는 점, 조선 민족의 민족적 존엄을 유린하고 민족정신을 마비시키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강요하고 있는 점, 각 학교 학생회를 자치회로 할 것 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켜 각 학교의 동맹휴학을 자행하고자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에 앞서 1925년 11월에 조선공산당의 정책으로서 학생의 계급의식 교양 훈련을 목적으로 이병립(李炳立), 박순병(朴純秉) 등으로 하여금 조선 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했다.

1927년 1월에 와서 야체이카 경기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한일청이 책임자로 다시 노출됐다. 그래서 한일청, 이석훈, 박찬식 등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과 연계시켜 검거해 야체이카 중앙 본부의 활동이 정지됐다.

공안에 방해될 수가 있다고 해서 재판 공개를 금지하고 1929년 4월 1일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서울의 중앙고보에 재학하면서 야체이카 활동을 하던 때인 1928년 2월 17일 그의 모교 제주공보교(濟州公普校·현 제주북교)에서 5·6학년 학동들은 동 2월 20일 “일본 경찰에 아첨하는 교사 강태현(康泰鉉)을 축출할 것과 교내 게시물의 내용을 공개할 것” 등을 요구하며 동맹 휴학을 단행했다.

이 일로 5년생 김기범(金基範·18)외 2명, 6년생 고태륜(高泰崙·16) 외 4명과 신영두(愼永斗·18) 등 모두 9명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서울의 야체이카 활동으로 퇴학 상태에서 귀향, 기자로 직필을 휘둘렀으나 당국에 의해 많이 제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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