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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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칼럼니스트

부끄러움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자책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부끄러운 감정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거나 인간관계와 사회 규율을 존중할 때 나타난다.

신화연은 ‘부끄러움 코드(2010)’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마비된 사람은 원만한 인간관계가 어렵고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들의 후안무치와 폭력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고 했다.

이런 부끄러운 감정 마비 현상은 비단 개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 사회 조직의 이런 현상은 다분히 의도적이어서 개인의 사고나 성향까지 지배하려든다.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으로 이슈가 된 ‘팬덤(fandom)정치’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도 열성 지지자들의 광기에 가까운 행태를 목도한다. 이제는 연예계를 넘어 정치판이 그 중심에 자리한다. 그 열성 지지자들을 배경 삼아 벌이는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도 선동적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부끄러운 기색은커녕 오히려 큰소리치며 호응을 유도한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찾아볼 수도 없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우격다짐뿐이다.

상대편을 수사하고 재판하여 유죄로 판결할 때는 법은 공정하다며 찬사를 보냈던 이 정권 인사들이 자신들을 수사하여 유죄 판결을 하니 불복종을 넘어 해당 검사와 판사를 향해 떼거리로 공격했다.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까지 좌지우지하려든다. 절대 다수 의석을 앞세워 법마저 저들의 유·불리에 따라 맘대로 고치거나 새로 만든다. 무서울 게 없다는 듯 밀어붙인다. 절대 권력의 막장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선출된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합법적으로 전복될 수 있다”고 한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의 지적이 우리 정치판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평등과 공정과 정의의 기치를 내건 정권의 민낯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분노와 공포가 밀려온다.

통치 행위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은 국정을 믿고 따른다. 안심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오늘의 삶에 매진한다. 국민과 진솔한 소통이 필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진정성보다는 국면 전환을 위한 기획된 연출처럼 듣기 좋은 말이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만 나열하면 신뢰나 호응보다는 불신과 억측만 난무한다.

새해 1월도 다 기운다. 지난해의 고통을 잊게 할 새로운 희망과 행운을 기대해 보지만 코로나도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다. 오히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국민 세금을 가지고 코로나 지원을 앞세우며 여론을 호도하려 들 정치권의 작태가 더 우려된다. 그 실효성보다는 득표 유·불리나 저울질하면서.

전쟁의 고통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잘못된 정치 또한 전쟁 못잖은 고통을 국민에게 안긴다. 역사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북한을 비롯해서 자원 부국임에도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운 악정 때문에 빈국으로 추락한 남미 국가들이 이를 증명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충분한 숙고 없이 주위에 휩쓸려 잘못된 정치가나 그 세력에게 권력을 내주면 그 대가는 목숨으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오늘의 우리의 정치 상황을 빗댄 경고가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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