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죄인의 귀양지…세상과 등져 고초를 견디다
중죄인의 귀양지…세상과 등져 고초를 견디다
  • 제주일보
  • 승인 202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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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주의 유배문화
‘고려사’에 첫 기록…당쟁 격화되던 조선 중기 남용되기도
땅 척박했던 대정현에 가장 많이 배정돼…정온·김정희 등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귀포시 대정읍 소재 제주추사관. 추사는 1840년부터 8년 3개월 동안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 유배, 추사체와 걸작 세한도를 완성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귀포시 대정읍 소재 제주추사관. 추사는 1840년부터 8년 3개월 동안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 유배, 추사체와 걸작 세한도를 완성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유배란 중죄를 지은 사람을 먼 곳으로 보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유형, 유배, 귀양, 귀향으로 불려지며, 유배인을 유배다리, 귀양다리라 부르며 업신여기기도 했다. 

▲제주의 유배문화

귀양은 흔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귀향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말 고대 그리스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유형이 등장하며 고려시대에는 오형제도 즉 사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의 규정이 확립됐고, 조선시대에 와서 법제화됐다. 

조선시대의 유배인의 경우, 세상과 등지게 하는 절세(육지)로 보낼 적에는 육진과 강변 고을에, 섬에 보내 세상과 등지게 하는 절도로 보낼 경우는, 제주·진도·남해·거제 등을 이용했다. 특히 제주는 역모와 연루된 중죄인들이 보내졌다. 

▲제주 유배의 역사

1270년 삼별초가 입도해 애월 고성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응전하나, 1273년 1만2000여 명의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탐라는 100년 동안 몽골의 지배에 들어갔다. 

1274년부터 원나라는 제주를 유형지로 삼아 도적, 죄수, 왕족, 관리, 승려 등을 보냈다. 

1374년 314척의 전함과 2만5605명의 군사들로 구성된 최영 일행은 목호의난 진압차 제주로 오가던중 후풍처인 추자도에 들러 문명을 물려주기도 했다. 

명나라는 운남성 양왕의 아들인 백백태자, 원나라의 달달친왕 등 왕족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원나라 후손들은 제주에 정착해 양, 안, 강, 대씨 성을 남겼다고 전한다.

고려 멸망 이후 운남에 거처하던 원나라 양왕(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의 다섯째 아들)의 자손과 원의 상류사회인들이 제주에 영주케 되고, 그들의 문화와 풍습이 제주선인들의 문물과 융합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주가 본격적으로 유배지로 등장한 것은 사화와 당쟁이 많았던 조선시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 4000여 명 중 700명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섬에 가두는 절도안치(絶島安置)에 처해진 유배인들은 제주에 오면 자유로운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배인들은 제주에서 교육을 하거나 예술을 더욱 승화시켜 독특한 유배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여말선초 시대에 제주에 유배온 고려왕조 유신들이 이 지방의 문물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제주의 4현이라 불리는 고려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한천(가시리, 청주 한씨 입도조), 고려 공양왕 때 도첨의좌정승을 지낸 김만희(곽지, 김해김씨 입도조), 고려 조정의 교리이자 대학자 이제현 증손인 이미(도두, 경주이씨 입도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선덕왕후의 4촌동생인 강영(함덕, 신천강씨 입도조) 등이다.

죄형 정도에 따라 제주에서도 유배지가 갈려지는데, 오현의 한 사람인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가 8년 넘게 적거했던 대정현에 가장 중한 죄인이 배정되기도 했다. 제주섬에 유배된 사람들은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 양반들을 비롯해 중인이나 평민, 남녀노소 등 계층이 다양했다. 

중죄인들은 가시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위리안치형에 처해져 외부와 고립되고 힘든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1907년 경성감옥인 서대문형무소가 생기면서 감옥에서의 수용생활과 유배형이 병행되다가 사라졌다. 

탐라가 유배지로 처음 등장한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
탐라가 유배지로 처음 등장한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

처음으로 탐라가 유배지로 등장한 기록서는 고려사이다. 고려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인물 등을 총망라해 기전체로 정리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는, 1275년(충렬왕 원년) 도적질을 한 100여 명을 탐라에 유배보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어 1317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위왕 아목가를 탐라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후에 대청도로 옮겼다는 기록도 보인다.

죄인을 배치하는 지역을 기록한 책인 의금부노정기에 의하면, 죄인은 도성을 출발해 각 유배지에 정해진 일정 안에 도착해야 하는데, 제주는 13일 안에, 가장 긴 시간이 걸리는 곳은 함경도 경흥으로 24일 안이다. 

▲제주에 온 유배인

한말 외무대신 김윤식이 1887년 5월부터 1921년 12월까지의 일기를 기록한 속음청사에는 제주 유배인과 제주 문인들이 교유했던 기록이 있으며, 유배인들이 날마다 늘어나 제주섬에 가득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윤식은 1895년 친일 김홍집 내각의 외무대신이었으며 이듬해에 명성황후의 폐위문제를 기초한 죄로 제주에 유배됐다.

한편 유배인들은 제주도의 이국적인 기후와 환경 등에 낯설어했고 이를 기록에 남겼다. 

이건이 집필한 ‘제주풍토기’.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건이 집필한 ‘제주풍토기’.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표적인 사례가 이건의 ‘제주풍토기’다. 이건은 풍토기에서 항해의 불편함, 뱀신앙, 기후, 목축 상황과 목자의 고통, 농사의 경작상황, 귤 종류에 대한 설명, 제주도 여인의 풍속, 잠녀의 풍속과 관원들의 횡포, 신당의 모습 등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배 중 가장 혹독한 형벌로, 중죄인을 원악의 도서로 유폐시키는 절도안치가 멀리 귀양보내는 원배보다 선호됐다. 

원래 제주도에는 ‘죄명이 특히 무거운 자가 아니면 정배되지 않는다.’ 혹은 ‘제주목에는 특별한 교지가 없으면 정배되지 않는다.’라는 ‘대전회통’의 규정에 따라, 제주도로의 유배를 신중하게 다뤘다. 

하지만 제주 유배는 당쟁이 격화되던 조선중기부터 남용되기도 했다. 

▲조선 최대 유배지 대정현

대정현은 제주목과 함께 유배인이 가장 많이 배정된 곳이다. 이곳은 제주에서도 땅이 척박해 생활 형편이 피폐했던 곳이다. 

제주도에 유배된 조선시대 정치관료를 비롯한 유명 인물은 50여 명 정도인데, 대정현에 35명 정도가 유배됐다. 

대정현 유배인으로는 연산군 때 김순손, 김양보, 중중 때 이세번(고부이씨 입도조), 광해 때 정온, 조직, 현종 때 심명규, 이지달, 숙종 때 유혁연, 오시복, 김춘택, 경종 때 신임, 김학손, 영조 때 서종하, 이거원, 임징하, 김유경, 이선철, 조중명, 조관빈, 장희재, 조영순, 권진웅, 순조 때 정난주, 헌종 때 김정희 등 조선시대 주요 정치인이 망라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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