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설중매(雪中梅)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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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겨울은 매몰찬 삭풍과 혹한에 나기 어려운 고난의 계절이다. 그 고난 속에 망울을 터트리는 꽃에서 만나는 봄의 감동 만한 게 어디 또 있으랴. 성성한 눈발 속에 이적처럼 피어난 꽃을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눈 속에 피어난 매화다.

1월이면 수없이 피어나 동창 앞을 밝히던 백매가 떠오른다. 흑흑 칠야에 닥지닥지 달아놓는 그 지등들이 내뿜는 향기가 방으로 스며들어 코끝이 다 얼얼했다. 흰빛과 단아한 맵시와 짙은 향기가 순일(純一)한 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이었다. 떠나면 더 그리운가. 밖엔 함박눈이 너풀거리는데, 여름에 떠나온 옛집의 동창 앞 백매가 그립다.

설중매엔 일화가 있다. 설중매가 기명(妓名)인 고려 말 송도 기생 ‘설중매’는 미모에 재주가 빼어난 데다 일화로도 유명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뒤 개국 공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위로연을 베푸는 자리에 설중매가 불려 나갔다 한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어느 정승이 설중매에게 농담을 건넸다.

“내가 들으니, 너는 아침엔 동쪽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던데 오늘 밤 나와 같이함이 어떠하냐?”고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참으로 고명하신 대감님의 말씀 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아침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기생이오나, 어제는 왕 씨를 모시고 오늘은 이 씨를 섬기는 대감이니 좋은 짝이 되겠습니다.”라 답했다. 취중이긴 하나 설중매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가 비수가 돼 꽂혔으리라. 자리를 함께했던 사람들이 다들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떴다 한다. 한겨울 설중매의 기품을 좋아해 자신을 ‘설중매’라 했을까.

비록 기녀라 하나, 에둘러 할 말을 다했잖은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저버린 고려 유신들이 한 기녀에게 의표(意表)를 찔려 곤혹스러웠을 게다.

매화와 다퉈 피는 봄의 전령사들이 있다. 언 땅을 덮은 부엽토를 비집고 고개 내미는 황금색 복수초. 지난 1Ÿj 하순, 한라생태숲에 피어난 것을 신문이 알렸다. 이름 그대로 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꽃이다. 티베트 산악지대, 만년설 바위틈에 돋아날 무렵이면 식물 자체에서 뜨거운 열이 뿜어나와 주변에 쌓인 눈을 몽땅 녹여 버린다는 ‘노드바’를 닮은 꽃. 복수초도 눈이 녹기 전에 눈 속에서 꽃을 피우며 열기를 뿜어 눈을 녹여 버린다. 봄을 알리려 샛노란 꽃이 낙엽 아래 숨어 피니 신기하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다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나와 2월부터 꽃을 피우고는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 봄을 기다려 서서히 열매를 맺는 꽃이 있다. 변산바람꽃. 꽃대 위 하얀 꽃받침이 마치 우산같이 펼쳐져 숲속의 요정을 대하는 듯하다. 짧기만 한 봄, 남도라고 그냥 오는 봄이 아니다. 고 작은 변산바람꽃이 데리고 온 봄 아닌가.

노루귀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 봄에서 4월까지 흰색, 연한 붉은색, 청색으로 알락달락 피는 꽃. 잎보다 먼저 긴 꽃대 위에 한 송이 꽃을 내미는데, 꽃대에 솜틀처럼 잔털이 돋아나 노루귀 같다고 노루귀다.

제주엔 야산에 피는 꽃만 봄을 알리지 않는다. 눈발 날리는데도 성급히 울타리에 기대 피어 시들었다가 봄의 들머리에 온전히 피는 개나리, 이른 1월부터 섬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유채꽃도 서둘러 겨울을 밀어내고 제주에 봄을 불러들이는 봄의 전령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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