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싸움서 밀려난 지식인, 통한의 세월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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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유배지 안덕면 감산리
한죽 신임, 당시 동궁이었던
영조 두둔하다 위리안치돼
유배지 내 한학자 배출 기여
영조 탕평책 반대해 추방된
서재 임징하는 제주잡시 등
자연경관 주제로 작품 남겨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있는 감산작은박물관으로 가는 길. 박물관에는 몇 가지의 옛 제기와 농기구를 비롯해 탐라순력도 탄생 주역인 이형상 목사와 오시복에 대한 안내판도 게시돼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있는 감산작은박물관으로 가는 길. 박물관에는 몇 가지의 옛 제기와 농기구를 비롯해 탐라순력도 탄생 주역인 이형상 목사와 오시복에 대한 안내판도 게시돼 있다.

묵재 신명규와 그의 아들 한죽 신임은 대를 이어 대정현에 유배된 특이한 경우이다. 신임의 부친인 묵재 신명규(1618-1688)는 별도포로 입도, 1674년 9월 대정현 연래촌(현 예래)에 도착, 이애길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680년 숙종 때 벌어진 경신대출척(환국,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한 사건)으로 진도군에 유배 중 아들 신임의 상신에 의해 1683년 석방됐다. 묵재는 제주 유배 시 적소에서 고독과 곤궁 속에서도 지방자제의 훈학에 힘써 오흥숙(일명 오정빈)을 후일 과거에 급제시키기도 했다. 유배에서 풀린 후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한죽 신임 초상화.
한죽 신임 초상화.

▲한죽 신임

초상화의 주인인 한죽(寒竹) 신임(1639-1725)은, 84세인 1722년 대정현에 유배돼 감산촌에 적소를 마련했다. 1722년 신임은 소론을 꾸짖고 동궁(영조)을 보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1723년 전국적으로 한발이 심해지자 신임은 유배소에서 글을 올리길, 나라에 원죄가 많으면 한기(旱氣)가 심하게 된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죄수들에게 성은을 베풀어 위로 하늘을 감동케 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감격케 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1725년 2월 조정에서는 특사를 보내어 맨 먼저 사면장을 주어 환조(還朝)를 명하고 공조판서를 신임에게 제수했다. 즉시 출륙해 해남에 도착했으나, 노쇠한 신임은 전남 해남현의 객관에서 타계하니 향년 87세였다. 

대정현의 감산과 창천 인근에서는 후일 한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신명규 부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한다.

전적·호조좌랑·경기도도사·정언 등을 거쳐 1696년 지평이 되었던 신임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에 얽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성판관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 뒤 곧 병조좌랑 등을 거쳐 연안부사·수원부사·황해감사·대사간·이조참의·개성유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육조의 여러 벼슬과 참판과 공조판서,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지충추부사가 되면서 기로소(耆老所: 조선의 경로당으로 기사耆社라고도 함. 정2품 이상 벼슬을 한 자 중에서 70세 이상, 또는 연로한 임금(태종·영조) 등 군신이 함께 참여하는 서열 으뜸인 관청)에 들어갔다.

▲감산리에 유배된 사람들

지금의 안덕면 감산리에는 여러 유배인이 기거했었는데, 그중 임징하(1687-1730)와 오시복(1637-1716)에 대해 소개한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임징하는 1726년(영조2) 장령으로 복귀한 후에도 탕평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임징하는 평안도 순안현으로 유배됐다가, 다음 해에 대정현 감산촌으로 이배됐다. 이곳에서 그는 주변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지은 감산칠가(柑山七歌)와 제주잡시 20수 등을 남겼다. 

또, 지방 유생들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던 서재는 한때 창고천 근처에 적거하기도 했다. 1728년 서울에서 내려온 도사를 따라 다시 제주를 떠나 서울로 압송돼 고문으로 옥사했다.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복지회관에 자리잡은 서재 임징하 선생 적려유허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복지회관에 자리잡은 서재 임징하 선생 적려유허비.

정조 때 복권돼 이조참판에 추증됐으며, 그가 죽은 지 130여 년이 지나서 5대 종손인 임헌대가 제주목사로 부임해 감산리에 ‘서재 임선생 적려유허비’를 세웠다. 처음 적거지로 추정되는 감산리 옛길 북쪽 입구(고제영 집)에 세웠졌던 비는 안덕계곡 입구를 거쳐 지금의 감산리복지회관에 자리잡고 있다. 다음은 임징하가 유배 시에 지은 감산칠가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금슬같은 저 마누라 한 평생 애들 낳느라 병들어 /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 차마 죽어 이별되리라 말을 못 하겠네 / 내 죄야 당연하지만 그대 무슨 죄이던가 / 아아 두번째 노래 그리움을 노래하니 / 저 세상에서 어찌 만날 때 없으리오 / (중략) / 탐라는 푸른 바다 가운데 있고 / 그 가운데 나쁜 곳 오직 감산이네 / 스스로 유배객 되어 누구든 여기에 오면 / 예부터 열에 한둘만이 돌아가고지고 / 숲은 깊고 안개 짙어 하늘은 가려도 / 은하수는 가까워 잡힐 듯 하네 / 아아 나의 애닮은 일곱째 노래 이미 끝나니 / 한밤의 봄바람 가시 울 속에 이네.’

임징하는 1680년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임홍망(任弘望)의 후손이고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진구의 사위이다. 당시 조선은 1689년 발생한 기사환국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데, 기사환국이란 장소의(희빈)의 아들(균, 훗날 경종)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의해 젊은 왕후 민씨가 왕자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한 서인인 송시열 등이 몰락한 사건이다. 

기사환국으로 숙종을 지지한 남인에게 정권이 옮겨가고,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제주에 유배돼 결국 사사된다. 

기사환국으로 가문이 몰락한 김진구는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의 아들로, 숙종비인 인경왕후의 오빠이다. 김진구의 아들인 김춘택 역시 제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감산작은박물관에서 탐라순력도 탄생의 주역들을 만나다

임징하의 적려비를 보고 나오던 일행들은 올레 벽에 감산작은박물관이란 앙증맞은 서화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자그마한 마을에 박물관이 있음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감산리는 탐라순력도의 탄생과 관련한 오시복이 유배됐던 곳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에는 몇 가지의 옛 제기와 농기구를 비롯해 이형상 목사와 오시복에 대한 안내판도 게시하고 있었다. 

제주에 유배 온 인물 중에는 지방수령인 제주목사의 도움을 받아 유배생활의 편의를 얻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특히 숙종 때 남인이었던 오시복과 이형상 목사, 헌종 때 김정희와 장인식 목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목사가 죄인인 유배인과 연루되면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탐라순력도 편찬으로 널리 알려진 이형상 제주목사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사로운 무리를 두둔하고 보호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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