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유배 중 제주 여인과 혼인해 입도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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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제주의 중심 관덕정서 5년간 살며 학문 전파·후학 양성
김만일 딸 슬하에 아들 낳아…이인제, 훈련원 판관 역임
이익 자손들 오라동에 서당 열어 제주교육 발전에 기여
1971년 관덕정 모습. 분수대가 설치된 광장에는 관광버스와 관광객들이 운집해있다. 광고탑에는 제일극장에서 ‘아씨’를 상영하는 포스터가 붙여있다. 사진 제주시 제공.
1971년 관덕정 모습. 분수대가 설치된 광장에는 관광버스와 관광객들이 운집해있다. 광고탑에는 제일극장에서 ‘아씨’를 상영하는 포스터가 붙여있다. 사진 제주시 제공.

조선 후기 문신 이익(李翼·1579~1624)은 1612년 사마시(소과)에 합격한 후 그해 치러진 식년시(대과)에서 급제했다. 34세에 관직에 오른 그는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으로 승진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뜨겁게 달군 온돌방에서 증살(蒸殺·쪄서 죽임)했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익은 상소문에서 “왕이 경연(經筵)을 열어 정치를 논한 바도 없고, 늘 궁녀와 환관만을 접촉해 사사로운 뇌물이 끊이지 않으니, 백성들의 궁핍은 이미 극에 달했다”며 광해군의 전횡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노발대발한 광해군의 엄명으로 문초를 받던 이익은 영의정 기자헌이 거듭 상소문을 올려 구명운동을 벌인 끝에 죽음은 면하게 됐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1618년 제주에 유배를 왔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될 당시 제주목사는 무신 이괄이었다.

그는 목사 임기를 마친 후 인조반정에 참여, 광해군을 폐위시켰지만 2등 공신에 머물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켜 한양까지 점령하는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이괄 목사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인 이익이 유배를 오자, 관덕정 인근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어린 학동을 가르치는 동몽교관(종9품)에 임명하는 등 특별히 대우했다.

이익은 유배기간에 걸출한 문하생을 배출, 제주 정치와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고홍진은 1666년 전국 28명의 문과 급제자 중 한 명에 포함됐다. 고홍진은 성균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전적(정6품)에 올랐다.

문하생 김진용은 사마시에 급제한 뒤 숙녕전(왕의 신위를 모시는 전각) 참봉(종9품)에 제수됐지만 귀향했다.

김진용은 봉개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김진용은 봉개 명도암마을에서 살면서 명도암(明道庵) 선생으로 널리 불리게 됐다.

관덕정 인근에 설치된 이익 적거터 머릿돌.
관덕정 인근에 설치된 이익 적거터 머릿돌.

이익의 첫 부인은 일찍 사망했고, 아들과 딸을 낳은 둘째 부인도 그가 유배를 오기 전 별세했다.

부인이 없던 이익은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1596~1666)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유배 중 낳은 아들은 인제(仁濟)라고 이름을 지었다.

유배객이 제주여인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 ‘영(瀛)’, ‘탐(耽)’자를 넣었다. 인제의 이름에도 제주를 의미하는 ‘제’를 넣은 것이다.

이익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제주 입도조가 됐으며, 아들 인제는 무예훈련을 맡았던 관청인 훈련원 판관(종4품)에 올랐다.

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난 이익은 제주에서 얻은 자식의 존재를 밝혔다. 영의정 최석정이 지은 이익의 묘비명에는 “세 번째 장가를 들어 훈련원 판관 인제를 낳았는데 이는 유배 때 출생했다”고 기록했다.

이익의 자손들은 제주시 오라동에 터전을 잡으면서 제주교육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이중발과 이수근은 과거에 급제했으며, 이기온과 그의 아들 이응호는 구한말 제주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가 됐다.

이기온은 항일의병운동을 일으킨 최익현이 제주에 유배를 오자, 사제의 연을 맺었다.

그는 1881년 사설학당으로 오라마을에 ‘문음서숙’을 열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의 아들 이응호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문연서당’을 열었다. 제주도청 앞 도로명이 ‘문연로’가 된 이유는 최익현과 이기온을 모신 사당 ‘문연사’에서 유래됐다.

이익의 유배지는 관덕정 바로 옆에 있었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유산이다.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무예 수련을 위해 훈련청으로 창건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활쏘기 대회 등 중요 행사는 관덕정 광장에서 열렸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 당시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인과 양민 등 316명이 학살됐다. 민란의 장두에 선 이재수 역시 관덕정 광장에서 목이 베어졌다.

일제는 제주목 관아는 모두 허물었지만, 제주의 상징인 관덕정은 그대로 뒀다.

1947년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시위와 경찰의 발포는 4·3의 도화선이 됐다.

1949년 일제가 지은 제주도청 건물이 방화로 소실되자 관덕정의 사면을 판자로 막고, 창문을 달아 임시 도청 청사로 이용됐다.

1952년에는 도의회 의사당, 북제주군청 임시 청사에 이어 미문화공보원으로 사용됐다.

1949년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개최됐고, 1960년에는 이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학생 궐기대회가 열렸다.

1970년대 관덕정 주변에는 제주도청과 제주시청을 비롯해 제주경찰국, 법원, 검찰청 등 주요 관공서가 들어섰다.

제주시는 2003년 27억원을 들여 관덕정을 완전히 해체한 후 부식된 목재와 변형된 구조물을 교체하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원형을 복원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관덕정의 옛 영광은 원도심의 석양에 기울고 있다.

제주시 오라동에 있는 이익 부인의 묘(김만일 딸 묘). 이익의 자손들은 제주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제주시 오라동에 있는 이익 부인의 묘(김만일 딸 묘). 이익의 자손들은 제주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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