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안녕,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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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뜻밖인가요? 저도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될 줄 몰랐어요. 당신에게 많이 길들여졌거든요.

해가 바뀔 무렵이면 지난 수첩을 펼쳐놓고 한 해를 돌아보곤 한답니다. 새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구요. 요즘 사람들은 주로 수첩 대신 스마트폰을 많이 쓰지만 저는 아직도 수첩에 기록하는 걸 좋아하지요.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주는 묘한 매력과 편안함이 있거든요.

지난 수첩에는 1년 동안의 행적이 빼곡히 적혀있어요. 깨알 글씨로 집안의 제사며 가족들의 생일은 물론 하루하루 일정이 메모 되고 일주일씩 또는 한 달씩 단기 계획에서부터 1년 동안 수행해야 할 일들이며 희망사항과 꿈들이 쪼르르 적혀 있죠. 수첩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만났던 사람들과 수행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군요. 그날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필체와 글씨의 크기, 군데군데 흘려놓은 감정의 앙금들은 울컥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불끈 주먹이 쥐어지기도 하고 낯이 뜨거워져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계획했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더라구요. 왜냐구요? 정말 모른 척 하긴가요?

수첩을 찬찬히 살피며 성과지표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승급심사(?)를 했어요. 새해의 과제로 넘어가는 것들이 많을수록 평가점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죠. 결과가 어땠냐구요? 정말 어처구니없군요. 정녕 모르겠다는 말인가요? 정말이지 당신과 ‘거리두기’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나 무력한 제 자신을 확인하고야 말았죠. 오히려 당신은 너무나 철저하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이를 갈라놓았으니까요. 말도 하지 마라, 음식도 같이 먹지 마라, 손도 잡지 마라. 침방울이 조금이라도 튀면 큰 일 난다며 난리법석을 떨었으니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선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의 위력을 알리며 조심하라 하더군요. 당신의 동향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는 전쟁 중 대피신호 알림처럼 늘 긴장하게 했죠. 그렇게 1년이 갔지만 간 게 아니었어요. 모든 것이 정지된 시간이었을 뿐이죠.

당신을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무엇에 홀린 듯 그냥 넋을 잃은 저에게 당신은 늘 위압적인 자세로 명령을 내리기만 했으니까요. 혼미한 상태로 끌려가기 시작했죠. 장례식장에도 가지 마, 결혼식장에도 가지 마, 제사도 명절도 함께 모여 지내지 마. 금지, 금지, 금지. 모든 것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축소하고 생략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걸 노린 건가요? 제가 사람들과 멀어진다고 당신만을 사랑할 줄 알았나요? 어려운 시대일수록 함께 나누고 서로 돕는 게 인지상정인데 ‘거리두기’ ‘집합금지’ 상황들은 주변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게 만들었어요. 계획했던 것들이 미뤄지거나 취소되다 보니 의미 있던 많은 것들이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죠. 앞으로의 계획도 ‘무계획이 계획’이 될 것만 같아 참담하기까지 하니까요. 당신의 계획만이 들어맞는 것 같았죠.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은 없을 것 같더니 백신이 개발되고 치료제도 경쟁하듯 나오는 중이죠. 어때요, 지금 기분이? 비참하게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떠나길 바랄게요. 악연도 인연이기에 마지막 너그러움으로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 이제 그만, 미련 없이 헤어지기로 해요.

코로나 씨! 그럼 안녕,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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