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희빈 택한 숙종, 장희빈 비판한 관리 유배 보내
(7) 장희빈 택한 숙종, 장희빈 비판한 관리 유배 보내
  • 좌동철 기자
  • 승인 202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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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김춘택 父子 동문시장 인근 한 적거지에서 5년간 귀양살이
한글소설 사씨남정기 쓴 김만중 종손 김춘택은 한문본으로 번역
사위 임징하는 안덕 감산리로…온 가족이 제주 유배길 올라
1980년대 동문시장㈜ 건물. 1965년 완공된 동문시장㈜에 동양극장이 들어선 모습. 건물 앞으로 지나가는 포니승용차가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 제주시 제공.
1980년대 동문시장㈜ 건물. 1965년 완공된 동문시장㈜에 동양극장이 들어선 모습. 건물 앞으로 지나가는 포니승용차가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 제주시 제공.

조선 19대 임금 숙종(1661~1720)은 정실 부인만 3명을 뒀다. 첫째 인경왕후는 왕비 책봉 10년 만에 천연두를 앓고 세상을 떴다. 이어 인현황후 민씨를 왕비로 맞이했지만 7년간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 와중에 후궁으로 들어온 장희빈이 아들을 출산했다.

숙종은 태어난 지 3개월이 된 아들(훗날 경종)을 세자로 책봉했고, 장희빈은 왕비로 올랐다. 중전이던 인현왕후는 폐위됐다.

숙종의 첫째 부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당시 병권과 경제권을 잡고 있던 광성부원군이다. 김만기의 동생은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이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구(1651~1704)는 장희빈이 왕비에 오르자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세자 책봉 문제는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으로 비화됐고, 숙종은 서인을 숙청하고 남인을 정계로 끌어올리는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동문시장 건물 옆에 설치된 김진구 적거터 머릿돌.
동문시장 건물 옆에 설치된 김진구 적거터 머릿돌.

당쟁에서 탄핵을 받은 김진구는 제주에 유배됐다.

김진구는 제주시 동문시장 가락천 인근에서 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오정빈·고만첨·양수영·이중발 등 제자를 배출했다.

김진구의 열성적인 가르침에 이들 대부분은 과거에 급제해 제주에 교학 열풍을 불러왔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김진구는 유배에서 풀려나 호조참판으로 복직됐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폐출됐다. 장희빈은 인현왕후 저주 사건으로 1701년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1670~1717)은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모해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고 1706년 제주에 유배됐다. 그는 부친이 살았던 적거지에서 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21대 왕에 오른 영조는 평생 콤플렉스를 겪었다. 심지어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영조는 악형을 금지했지만 이 같은 소문을 언급하는 자에게는 심한 형벌을 가했다.

김만중의 쓴 ‘사씨남정기’는 한글소설로 백성들에게 널리 읽혔다. 아름답고 정숙한 사씨 부인이 남편의 첩인 교씨에 의해 쫓겨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을 접한 백성들은 등장인물이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을 빗댄 것이라고 여겼다.

장희빈을 왕비로 맞이한 숙종의 마음을 돌리려는 의도로 지은 이야기라는 설은 정설이 됐다. 김만중의 종손자(형의 손자)인 김춘택은 고관대작들도 사씨남정기를 보도록 한문본으로 번역했다.

김춘택은 또 제주의 풍물을 비롯해 귀양살이의 쓰라린 정경과 불우한 일생을 시문과 산문으로 묘사한 북헌집(北軒集)을 남겼다.

안덕면 감산리복지회관에 들어선 임징하 선생 유허비.
안덕면 감산리복지회관에 들어선 임징하 선생 유허비.

김진구의 사위이자 김춘택의 매제인 임징하(1687~1730)는 과거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 장령을 역임했다.

6개 조의 상소문을 올려 영조 임금의 탕평책을 반대하며 붕당의 한 정파인 소론(小論)의 제거를 요구했다가 1726년 평안도 순안에 이어 1727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유배됐다. 그는 가택연금형에 해당되는 위리안치를 당했다.

임징하는 이듬해 사헌부의 요구로 한양에 끌려가 역모죄로 국문을 당했다. 그는 끝까지 왕의 각성을 촉구하며 항거했다.

조선시대 언론역할을 하며 임금에게 고언을 하는 사간원 언관(言官)은 벌주면 안 된다는 전통에도 불구, 왕권 확립과 국가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여덟 차례 고문을 받은 임징하는 옥사했다. 정조 때 사면돼 관직이 복구됐고, 이조참판에 추증됐다.

임징하의 5대손 임헌대는 제주목사로 부임한 후 1862년(철종 13) 감산리에 ‘서재 임선생 적려유허비’를 세워 충절과 의리를 기렸다.

유허비는 감산리의 속칭 묵은터에 있다가 1997년 안덕계곡에 이어 2004년 감산리복지회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제주목사 임헌대는 과오가 있었다.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1862(철종 13) 4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이 삼남 지방으로 확산돼 제주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18629~11월 세 차례에 걸쳐 조세 폐단과 탐관오리의 처단을 요구하는 제주민란이 일어났다.

봉기에 나선 백성들은 임 목사에게 화전세의 감세와 군포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임 목사는 화전세를 재조사하고 모든 폐해를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민중은 해산했다.

봉기에 나선 민초들은 백성을 괴롭혔던 대표적인 아전 5명을 직접 타살하려던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임 목사는 그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겠다는 확답을 했다.

그러나 임 목사는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대정현과 정의현 봉기 참가자들을 잡아들이도록 명령했다.

이에 제3차 봉기는 그해 1115일부터 129일까지 이어졌다. 강제검·김흥채·박흥열·조만송 등이 봉기를 주도했고, 참여자는 수만 명이 이르렀다.

봉기민들은 제주성으로 밀고 들어가 아직까지 다섯 죄인을 처형하지 않았음을 성토했고, 관아를 점거했다. 그러자 임 목사는 겁에 질려 화북포로 피신했다가 그해 1225일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조정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8631월 파직된 임 목사를 평안북도 초산으로 유배를 보냈다.

김진구·김춘택 부자가 유배생활을 한 적거지에는 동문시장㈜이 들어섰다.

1945년 광복 전후 용천수가 나왔던 가락천 하류에는 채소·식료품·신발·포목을 팔던 노점상이 즐비했다.

이 노점상은 상설시장으로 변모해 제주상업의 근거지가 됐다. 1954년 3월 시장에 큰 불이 나면서 112채의 가건물은 잿더미가 됐다. 미 8군의 원조로 시장은 재건했으나 그해 10월 담뱃불로 또 다시 화마에 휩쓸렸다.

상인들은 제주 최대의 상권에 번듯한 건축물을 짓자는 데 뜻을 모았다.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2월 김영관 해군 제독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건물 신축이 추진됐다.

당시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보도에 따르면 1억환(현재 가치 11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백화점과 시장을 절충한 동문시장㈜ 건물에는 점포 265개와 사무실·다방·이발소·전당포가 들어섰다. 1965년 상인들은 수익 사업을 위해 2층에 동양극장을 개설했다.

동문시장㈜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내 최대의 쇼핑타운이었다. 시장에 곡식을 판 농민들은 옷과 고무신을 사갔다. 회사원들은 월급날에 맞춰 생필품을 구입했다.

비단옷감 등을 팔았던 포목점은 명맥을 이어가면서 지금도 의류와 침구·커튼 판매가 주력 업종으로 자리 잡았다.

포목점이 주력 업종인 동문시장㈜ 점포 전경.
포목점이 주력 업종인 동문시장㈜ 점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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