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고향땅에 도내 첫 사립 초등학교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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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우현, 의약품 제조 기준 ‘GMP’ 국내에 도입한 약학박사
 백응선, 조천 만세운동 참여…1992년 독립유공 건국포장 수훈
 백이남, 재일교포 사업가…남녕학원 설립해 초대 이사장 취임
 백정혁, 재일제주도민회 고문 등 역임하며 동포들 신임 얻어
 백창유, 일본서 사업으로 대성…‘일신학교’ 설립에 거액 쾌척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소재 구엄초등학교. 구엄초의 전신은 사립 일신학교로 일본에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귀향한 백창유가 거액을 출연하며 설립을 주도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소재 구엄초등학교. 구엄초의 전신은 사립 일신학교로 일본에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귀향한 백창유가 거액을 출연하며 설립을 주도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백우현白于玹:1935~생존, 애월읍 소길리 출신, 약학박사, 저서 다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우수 의약품을 제조하는 기준(GMP)을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했고 제약회사 중앙연구소장 때는 대형품목의 신약을 개발했다.

▲백응선白膺善:1896(고종33)~1920(일제강점기),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항일 활동, 호 천야(天耶), 본관 수원.

백찬규(白燦奎)의 아들로 조천리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의 안요원(安堯媛)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안요원은 안요검(安堯儉)의 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는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년 3월 28일 네 살 된 딸을 남겨 두고 25세에 요절했다. 

1921년 백응선을 제외한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뜻이다. 동미회 회원 13명은 뜻을 모아 제1차 사업으로 백응선의 묘비 건립을 서둘러 김시범(金時範)이 한문으로 글을 짓고 교래 지경의 묘지에 ‘고 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란 비를 세워 측면에 13동지의 이름을 썼다.

 

▲백이남白二南:1916(일제강점기)~1990, 재일교포 사업가, 학교법인 남녕(南寧)학원 이사장, 호는 송제(松濟).

구좌읍 서김녕리 ‘김녕포’에서 백선우(白善宇)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와 사별, 역경 속에서 외항선 선원으로 타향에서 전전하다가 노경에 이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귀향했다. 

해방 직후 김녕리 남흘동 동장을 지내고 청운의 뜻을 품어 1947년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부지런히 활동, 사업가로 대성했다.

특히 향리에 있는 김녕초·중학교에 발전기금으로 거금을 쾌척한 바도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비행 청소년 선도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청소년 지도에 대한 내각 총리의 공로상을 받았다. 1980년 10월 도쿄(東京)에 성남(成南)종합병원을 설립했다.

또 조국애와 애향심의 표시로 육영 사업에 뜻을 두어 1985년 2월 21일 학교법인 남녕학원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1986년 3월 3일 대지 1만1000평, 총 건평 3300평인 남녕고등학교가 개교돼 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87년 12월 5일 학원 발전을 위한 수익 재단으로 주식회사 남녕개발을 경기도 지역에 설립했다.

사후 남녕고교 교정에서 학원장(學園葬)으로 고별식이 거행됐고 이날 유족 11남 2녀가 유업을 이어나가기로 다짐했다. 

1993년 2월 23일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백정혁白丁赫:1920(일제강점기)~2007,  재일 거류민단 간부, 민단 오사카지부 의장, 일명 백중석(白仲錫), 본관 수원, 제주입도 10세손.

동림(東林)공파의 백창아(白昌兒)의 큰아들로 애월읍 신엄리 ‘엄쟁이’에서 태어나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일찍이 도일(渡日)해, 사업에 종사하더니 청산(靑山)학원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백천(白川)피복㈜ 사장이 됐다. 

신엄중학교 내에는 그를 기리는 이들의 정성으로 ‘백정혁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다. 

애월중 동창회장을 역임한 언론인 백흥관(白興官)의 선친이다. 재일제주도민회 고문, 재일거류민단 오사카시 동성구(東成區) 지부단장, 민단 오사카 본부의장으로서 3년 임기인 선거에서 2선을 하는 등 주변의 신임을 가득 받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1962년 ‘5·16 구국혁명 1주년 기념’을 계기로 사절단 단장으로 임명돼 재일동포 방문단 인솔 대표로 한국을 처음 방문할 수 있었고 활동이 대단해 민단본부의 인정을 받았다. 향리를 위해 거금을 보내고 이후 김영관(金榮寬) 도지사 재임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일본으로 지역 인사들을 초청, 서로 방문하는 등 활발한 교류를 지원했다. 

아울러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과 친교가 깊어 총리의 특별 배려로 향리에 신엄중학교 설립을 서둘렀으며 이로써 개교를 했다. 이는 근친 백창유(白昌由)의 일신학교 건학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고 오사카 동성구 대금리서(大今里西) 2-6-14번지에서 병몰하자 향리로 반장(返葬)해 장례를 치렀다. 

구엄초등학교 내에 있는 백창유 송덕비.
구엄초등학교 내에 있는 백창유 송덕비.

▲백창유白昌由:1889(고종26)~1948(미군정기). 일제강점기의 육영 사업가, 일신학교 창설자.

본관은 수원이며 애월읍 신엄리 ‘새-엄쟁이’에서 태어났다. 2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촌(鑛山村)에서 음식점을 경영해 많은 재력을 축적하고 귀향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 당국이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일면일교(一面一校) 정책을 추진하자 마침 애월면에도 초등학교 1개교를 개설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922년 6월 백창유는 5000엔을 단독 출연해 향리에 초등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이에 감동한 신엄리의 독지가 성여흥(成呂興)이 교지 3300평을 희사한 후 급진전 돼 사립 일신학교가 개설됐다. 

재단법인 사립 일신학교재단을 구성하고 이사는 김도현(金道鉉) 애월면장, 백창유, 고형수(高瑩洙), 강경생(姜慶生), 문영백(文永伯) 등이 담당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도내 유일의 법인체 학교였으며 초대 교장으로 김익수(金翊洙·하귀)를 초빙했다. 

한편 백창유는 막대한 사비를 들여 광령지구 수리 사업을 결행했는데 이는 수로를 만들어 어승생(御乘生) 물을 광령까지 10㎞ 이상을 끌어당겨 논밭을 만드는 사업으로 선각자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대사업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재정이 어려워졌을 때 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이 심하자 부득이 1939년 일신학교의 전 재산을 신설 공립학교로 헌납 귀속시킴으로서 구엄공립국민학교가 새롭게 출범하게 됐다. 

일제 말기 일본의 전쟁 수행이 어려워지고 제주도가 미일(美日)전쟁의 싸움터로 변할 조짐이 보이자 이때 온 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논산(論山)으로 소개(疏開) 이주해 후손들도 현재 그곳에 살고 있다. 

수년 전 주민들은 구엄국민학교 한 모퉁이에 ‘개척자 백창유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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