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생활의 외로움을 딛고 탄생한 명시들
고립생활의 외로움을 딛고 탄생한 명시들
  • 제주일보
  • 승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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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유배인 임관주·김정희
잦은 재상 교체·관원 비리 등
비판하다가 귀양 온 임관주
아름다운 경관과 해배 소회
창천리 등서 마애명에 남겨
대정에 위리안치 된 김정희
걸작 세한도·추사체 완성해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있는 임관주 마애명. 유배인 임관주는 재상의 잦은 교체,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등을 비판하다가 제주에 유배됐다.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있는 임관주 마애명. 유배인 임관주는 재상의 잦은 교체,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등을 비판하다가 제주에 유배됐다.

한라산과 천제연 등 제주의 여러 곳에서 마애명으로 만나는 임관주(1732-?)는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756년(영조 32) 과거에 급제한 임관주는, 1767년 정언으로 재임 중 언론의 중요함과 재상의 잦은 교체, 그리고 서울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여 제주에 유배됐다. 

▲유배인 임관주가 남긴 한시 감상

유배 두 달이 지나자 대신들이 바른말을 하는 관리를 섬에 계속 가둘 수 없다고 건의하자 영조임금이 특별히 석방했다. 해배 되자마자 임관주는 적거지에서 멀지 않은 안덕계곡의 상류인 창천을 찾아가 시를 지었다. 그의 시에는 유배에서 풀린 홀가분한 심정이 느껴진다.

‘비로소 사립문 나서는 날에야(始出荊門日:시출형문일)/ 먼저 베갯머리에서 듣던 시내를 들렸네(先尋枕下川:선심침하천)/ 세 구비마다 늘어선 푸른 바위(蒼嚴三曲立:창엄삼곡립)/ 늦가을 단풍 곁에 아담한 폭포(短瀑晩楓邊:단폭만풍변)’

창천을 둘러본 임관주는 산방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덕계곡에서 산방산은 지척이다. 산방산의 생김새와 천연적으로 형성된 산방굴사의 경치와 바다풍경에 놀란 듯하다.

‘돌로 된 신선의 굴(石作神仙窟:석작신선굴)/ 산방산에서 새는 물 공중에서 떨어지네(方山淚適空:산방루적공)/ 남쪽 하늘 푸른 바닷가 고장(南天滄海州:남천창해주)/ 오나라와 초나라 지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네(吳楚一望中:오초일망중)’

이어 그는 중문 천제연으로 가서 천제연에서 벌어진 활쏘기의 장관을 시로 남겼다. 임관주가 서각한 추인(芻人)이라는 시는 천제연 1단폭포 서북벽에 새겨져 있다. 암각한 바위글씨가 마모돼 천제연 광장 현무암 기둥에 다음의 시를 새겨 전시하고 있다. 

해서체로 세로로 음각돼 있는 천제연 마애명.
해서체로 세로로 음각돼 있는 천제연 마애명.

‘천제연이 열려 큰 폭포 흐르고(天池淵開大瀑流:천지연개대폭류)/ 총석들이 옮겨와 절벽에 깊은 못이 되었네(移來叢石壁深湫:이래총석벽심추)/ 공중에선 화살진 허수아비 줄타고 걸어가니(空中負箭芻人步:공중부전추인보)/ 가장 기이한 볼거리는 이곳 활쏘기이라네(第一奇觀此射侯:제일기관차사후)’

이어 그는 한라산까지 올라가 시를 옮고 마애명으로 남겼다. 

‘망망한 창해 드넓은데(茫茫滄海潤:망망창해윤)/ 한라 봉우리 하나 떠 있도다(一峯漢拏浮:일봉한라부)/ 백록 탄 신선 기다렸는 데(白鹿仙人待:백록선인대)/ 오늘에야 정상 올랐구나(今登上上頭:금등상상두)’

직언으로 두 번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던 만큼 임관주의 시는 거침이 없다. 지방관의 시가 상투적이고 정치적인 반면, 유배인들의 시는 힘차고 기상이 남다르다. 추사의 경우에서 보듯, 시나 문장은 쇠가 담금질해야 강해지듯 고통을 거쳐야 빼어난 글이 나오는 것 같다. 

한라산 등정에 이어 그는 제주목으로 가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즈음 제주목관아에서 가까운 취병담(용연)에 들려 마애명으로 벽에 새겼다. 

‘백록담서 내리는 물(白鹿潭流水:백록담유수)/ 못을 이루곤 바다로 흘러(爲淵大海潯:위연대해심)/ 벼랑 양안 푸르디 푸른 절벽(兩涯毘翠壁:양애게취벽)/ 나그네 고향 갈 배는 어디에(歸客片舟尋:귀객편주심)’

제주에서 돌아간 임관주는 1782년(정조 6) 시대의 폐습(時弊)을 다시 상소하자 탄핵을 다시 받아 흑산도로 유배됐다가 2년 후에 풀렸다. 

▲추사 김정희 제주에 유배 오다

1840년 대사헌 김홍근이 10년 만에 다시 윤상도 사건에 대해 논죄할 것을 상소했다. 이에 윤상도 부자를 추자도에서 잡아다가 대역무도죄로 국문 논죄해, 윤상도는 능지처참하고 아들을 베어 죽였다. 

또 연좌죄인들은 장사(杖死) 혹은 유배되는 경자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국문할 때 윤상도와 연좌죄인들이 김정희를 끌어들임으로써 연좌의 변이 미치게 됐다. 다행히 영조 때 제주에 감저 종자를 처음으로 전한 조엄의 손자인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추사는 감사(減死)돼 대정현에 1940년 9월 유배됐다.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금석학·불교학·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의 체계를 수립했던 김정희(1786-1856)가, 1840년(헌종 6년) 죄인의 몸으로 제주에 왔다. 

유배 8년 3개월 동안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국보 제80호인 세한도를 그리고 추사체를 완성하고 수많은 제자를 키우기도 했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권력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가 제주로 유배 온 까닭은, 윤상도 옥사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혐의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 혐의 뒤에는 조선 후기에 있었던 세도정치, 즉 경주김씨와 안동김씨 사이의 치열한 권력싸움과 갈등이 있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24세가 되던 해 동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당대 석학들인 옹방강·완원 등과 교류하면서 금석학·실학·차 문화 등을 접했다. 

그리고 55세인 추사가 다시 1840년 9월, 중국 사신으로 가려 행장을 꾸리던 중 헌종으로부터 유배 명령을 받았다. 추사가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 중 13통이 남아 있다. 

화북진으로 제주에 상륙한 추사는 적거지인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송계순 집으로 걸어가야 했다. 추사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 외부인 출입을 금하는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2년 뒤 송계순의 집에서 인근에 있는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가 옮겨졌다. 이때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이라 이름 짓는데, 매화·대나무·연꽃·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 고을의 전유물이란 의미에서였다. 

조선 최고 학자의 유배는 당시 제주 유림들에게는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연일 제주 곳곳에서 추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사공·박계첨·이시형·이한우·강도순 등이 추사의 제자들이다. 

제주 도처에서 꽃을 피우는 수선화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 준 벗이었다. 모진 눈과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고매한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보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수선화는 천하의 구경거리요, 동네마다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라고 편지에 쓸 만큼 추사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수선화에 대한 추사의 시를 다음에 옮긴다. 

‘한 점의 겨울 마음이 송이송이 둥글어/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냉철하고 빼어나구나/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뜰을 못 벗어나는데/ 해탈한 신선을 맑은 물에서 만나는구나.’

탐라순력도 현폭사후.
탐라순력도 현폭사후.

▲탐라순력도 현폭사후

1702년(숙종 28) 11월 6일,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대정 지경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과 하폭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해 화살을 쏘고 있는데,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을 좌우로 이동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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