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처럼
팝콘처럼
  • 제주일보
  • 승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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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올해 들어 폭설이 잦다. 온 섬이 꽁꽁 얼어붙어 제주가 오롯이 섬이 되곤 한다. 매화꽃 같은 함박눈이 허공을 휘저으며, 온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덮을 듯하다. 답답한 일들이 저 매운바람에 쓸려갔으면 좋으련만. 어두운 현실을 어서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소망이다.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동네 문 닫은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시름 깊을 주인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일 년이 대책 없이 흘러갔고 올해도 아직은 조심스럽다. 금쪽같은 시간을 뺏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초조하고 아쉬운 게 한둘 아니다. 세상이 갑갑하니 생각도 틀에 가둔 양 하얗게 말라 가는 것 같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코로나19 종식 후, 코킷 리스트(cocket list)를 이야기한다. 억제된 일상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건, 평범한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그중에 여행을 가고 싶다는 소망이 으뜸이다. 전염병이 종식되면 세계 곳곳에서 마치 팝콘 터지듯,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일제히 튕겨 나갈 것 같은 상상에 들곤 한다. 욕망이 웃음꽃을 피워 지구가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현실이 되길 꿈꾼다.

아이가 귀한 세상이다. 늘 비어있던 놀이터에 오랜만에 아이가 여럿 나왔다. 그동안 꼼짝 못 하고 묶여 몸살을 앓았던 시간이었으니, 답답했던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하늘을 향해 온몸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억눌렸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라. 저 아이들에게 솜사탕 같은 달콤한 추억을 품게 할지어다. 제 키보다 더 큰 눈사람을 품고 인증샷을 찍는 볼이 홍시처럼 발그레하다. 삭막했던 가슴에 오랜만에 웃음이 번진다. 별것 아닌 소소한 풍경이다.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인데 옛일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풀나풀 눈꽃 춤사위가 덩달아 달뜨게 한다. 이 순간 아쉽고 그리운 게 무에 있나. 함박눈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이다. 유리창을 마주하고 보기만 하기엔 아깝다. 며칠 신을 신어 보지 못했다. 하릴없이 창가를 서성이다 단단히 싸매고 집을 나섰다. 나이 들었다고 마음마저 늙었으랴. 아무도 걷지 않는 오솔길에 혼자 발자국을 남긴다. 찬바람에 코를 스치는 솔 향이 알싸해 맵다. 탁해진 영혼이 맑게 깨어날 것 같다. 순결한 눈길은 무심히 걷는 게 어울린다. 무얼 생각하고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것,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을 내다보면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 어떤 모습으로 오려나. 그래도 작년보다 올해는 나을 것이다. 밝은 세상이 온다면 나는 무엇에 마음을 둘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는데 하고 싶은 갈등은 때로는 열망을 품어 꿈꾸게 한다. 눌렸다 숨이 트이는 순간 깊은 동면에 들고 싶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그것만으로 다 이룬 것 같은 포만감으로 유유자적하게 되는 건 아닐지.

사위가 깊은 우물로 가라앉아 고요하다. 후박나무 잎이 잔풍에 부르르 떨어 눈을 털어낸다. 오붓한 정적을 깨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절절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도심까지 내려왔나. 가슴이 텅 빈 까닭인가. 배고픈 까마귀처럼 허기만 돈다.

이 시간은 내일을 위한 걸음이다. 묵묵히 걷다 보면 고난의 끝점이 보일 것이다. 눈인지 꽃인지. 한창 피기 시작한 향 그윽한 청매 앞에 걸음을 멈췄다. 밤새 저 여린 꽃이 얼지 않을까. 매화가 피기 시작했으니 코로나 백신도 곧 만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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