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명륜당에 주자 글씨 새겨…교육 환경 개선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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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경붕, 만경지역 가뭄 때 대용작물 재배 권장해 기민 구제
 변성운, 애월읍 출신…1765년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주서 역임
 변성현, 항일 독서회 활동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 치러
 변시민, 제주대 학장 등 지내…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변시중, 흥덕현감 등 역임…말년에 귤림서원 원장으로 훈학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대정향교 명륜당 전경.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태어난 변경붕은 대정현감에 도임한 후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 명륜당 현판을 만들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대정향교 명륜당 전경.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태어난 변경붕은 대정현감에 도임한 후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 명륜당 현판을 만들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변경붕 문집.
변경붕 문집.

▲변경붕邊景鵬:1756(영조32)~1823(순조23), 문신, 전라도 만경현령, 대정현감, 1756년(영조32) 중문에서 출생해 신도(뒌개)로 이주,  본관은 원주, 성휴(聖休)의 아들, 자는 중거(仲擧), 호는 일재(一薺). 

1794년 제주위유안핵순무 시재어사 심낙수(沈樂洙)가 내도해 과장을 개설해 문과에 7명, 무과에 10명을 시취할 때 그는 논(論)에서 발군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당시 논제(論題)는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이었다. 

1795년 문과 식년 전시(式年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봉상시(奉常寺)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대정현감·만경현령·연서찰방(延曙察訪)·사헌부 장령(掌令)·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했다. 

1786년(정조10) 10월 경기도 양주의 연서(延曙)찰방인 그는 시무오조(時務五條)를 상소했다. 문장에 뛰어나고 복술(卜術)에도 능통했다. 또 전라도 만경현령으로 재임 시에는 한발대책으로 대용작물의 재배를 권장해 기민을 구제함에 따라 유명해지고 후일 그로 인해 공덕비가 세워졌다. 

1811년(순조11) 2월, 한길모(韓吉謀)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도임해 정사를 잘 보살피고 1813년 8월에 떠났다. 

당시의 제주목사는 이현택(李顯宅), 조정철(趙貞喆), 김수기(金守基) 등이었다. 대정에 부임한 후 대정향교 명륜당에 주자필(朱子筆)을 본뜬 현판을 만들어 교육 환경을 개선했다.

1819년(순조19)에 공조참의에 서용했다. 

▲변성운邊聖運:1717(숙종43)~1787(정조11), 승문원 주서, 자는 중휴(仲休), 원주변씨 납읍파의 파조.

애월읍 납읍리에서 변시한(邊是翰)의 아들로 태어났다. 

1763년 어사 이수봉(李壽鳳)이 내도, 과거시험을 치를 때 그는 동향인 종제 변성우(邊聖遇·납읍)와 김형중(金衡重·납읍:나주김씨)과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마을 이름이 유명해졌다. 이로써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마을잔치가 크게 열렸다. 1765년 친림전시(親臨殿試)에서 급제, 관직은 승문원 주서를 지냈다. 

▲변성현邊聖現:1916~1938(일제강점기), 서귀포 독서회의 항일 활동, 본관 원주.

변용화(邊用化)의 차남으로 산남 법환리에서 태어났다.

1931년 3월 1932년 1월부터 홍순성(洪淳性·22, 일도), 윤태석(尹太錫·22, 서귀), 강봉주(康奉周·27) 등에게 ‘마르크스주의 화폐론’ 등 사회과학 서적을 읽도록 해 신년 소감문을 쓰게 했다. 1935년 8월 18일 서귀포를 중심으로 40여 명이 검거된 후 3개월 동안 조사받고 송순혁, 송달오, 강원화(25, 법환), 변성현(22, 법환) 등 4명이 기소됐다. 1937년 6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모두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건국장을 추서했다. 

▲변시민邊時敏:1918(일제강점기)~?, 대학 교수, 사회학 박사, 제주대학장 역임.

서귀읍 서홍리 1646번지에서 변정원(邊庭元)의 3남으로 출생했다.

1944년 9월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사회학 전공)를 졸업했다. 1945년 10월 1일 일본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에서 ‘시라이(白井理尙)’ 문학박사의 지도하에 연구를 해 1948년 2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취임했다. 

1948년 이학(理學)박사 김동일(金東一·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의 장녀와 결혼, 서울대학교 문과대학 교무과장(1957)을 지냈고 MRA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1958)했다. 문교부 문화국장도 역임(1958)했다.

대한일보사 논설위원(1960), 한양대학교 법정대 교수(1961), 재단법인 인구문제(人口問題) 연구소장(1965), 충남대 문리과대학 교수(1975)를 지냈다. 

충남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1975)를 받았고, 1976년 1월 국립 제주대학장으로 발령받았다. 1976년 말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변시중邊是重:1694(숙종20)~?, 문신. 훈학자, 귤림서원(橘林書院) 원장, 자는 중여(重汝), 본관은 원주. 

애월읍 납읍리에서 제주향교 교수 변희로(邊希蘆)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7년(영조3) 4월 제주시재어사 김상석(金相奭)이 내도, 시제(試題) ‘해불양파삼년부(海不揚波三年賦)’를 가지고 과장을 개최했다. 문과에 변시중 혼자 급제, 전시에 직부하게 하니 1728년(영조4) 문과복시(覆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741년(영조16) 8월 전라도 흥덕현감에 도임하고 이듬해 6월 떠났다. 

말년에 귤림서원 원장이 돼 후생의 교학에 몸 바쳤으며 문하생 이희경(李希慶)과 더불어 ‘귤림서원록(橘林書院錄)’을 수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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